[묵상]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연중 제4주간 월요일 (2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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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연중 제4주간 월요일 (2020.2.3.)

by honephil 2020. 2. 3.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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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디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사람들의 삶을 자꾸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갔습니다. 그를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이마저도 부수어 버리고,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쳤습니다.

 

이렇게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이 되었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족쇄와 쇠사슬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게 이르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어서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에게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제야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게라사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다고 하여도, 이 일 때문에 생계에 가장 필요한 돼지 이천 마리가량이 죽어 속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사실보다도 당장 먹고살 문제에 마음이 쓰일 뿐이었습니다.생계와 생명은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는 낱말입니다. 생계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참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계와 생명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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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돼지들에게는 마귀가 들어가도록 허락하신다>
 
복음: 마르코 5,1-2

영화 ‘거짓말’(2015)은 허언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가난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불행한 가정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밖에서는 거짓말만 하고 다닙니다. 자신은 그런 가정에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피부관리사로 직장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일을 마치면 고급 집을 살 것처럼 둘러보기도 하고 비싼 차와 전자제품을 산다고 했다가 마지막에 핑계를 대며 다음에 오겠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매우 부잣집 딸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없는 돈으로 비싼 차를 타며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입니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정신없는 사이에 냉장고가 배달되어 돈을 날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는 그녀의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쫓겨납니다. 홧김에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자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여드름 짜는 일이나 한다며 솔직하게 말했다가 모든 게 끝장나고 맙니다.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지옥으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허영심 하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심’이 어떻게 본성을 타락시키고 어둠으로 끌어내리는지 보여주십니다. 이미 마귀들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고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무덤’은 우리로서는 ‘지옥’의 상징으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원인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 마귀들을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느니 죽음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욕심’과 여러 다른 욕망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돼지는 욕심에 찌든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엔 지옥까지 끌고 가는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돼지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정중히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은 그러한 이적을 일으키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이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해버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욕심’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이 좋고 허영심이 좋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죽기를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마귀가 하는 말과 같이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예수님, 돈의 욕심을 버리라,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편안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의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돼지와 같은 인간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돼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제 허영심 대신 당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봉헌부터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봉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 자신의 욕심과 싸우겠다는 의지표명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귀가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않게 욕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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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의 특징(마르 5,1-20)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 19)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세상적인 익숙함을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탄은 세상적인 익숙함을 고집하게 합니다. 왜 그러한 고통을 사서 할려고 하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퍼져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낯선 곳으로 떠나가야 합니다.  공간적인 떠남도 중요하지만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도 떠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습관과 사고방식의 포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떠나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낯설고 불확실한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호수 건너편 게라사 인들의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이 지방이 어디인지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루카 복음에서도 이 지방의 이름을 ‘게라사 인들의 지방’으로 말하고 있지만 마태오 복음에는 ‘가다라인들의 지방’ 이라고 말합니다. 이 게라사인들이 사는 지방으로 알려진 이곳은  갈릴레아 호수 남동쪽 10킬로미터 지점, 네카폴리스 지방에 자리잡은 그리스식 고을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왔다고 합니다. 당시의 무덤은 자연동굴이나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들었답니다. 따라서 피신처로도 이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어쨌던 이 무덤은 부정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마르코 복음 5장 2절과 루카 복음 8장 27절에는 마귀들린 사람 한사람으로 되어있습니다만 마태오 복음은 마귀들린 사람둘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너무 사나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쩌면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이들을 쫓아내어 마을에서 떨어진 무덤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마귀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마태오 4장 3절에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분명하게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악마는 벌써 알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과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자신들의 삶에 간섭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덧붙여서 아직까지 자신들이 쫓겨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저희들을 쫓아낼려고 하십니까” 하고 말합니다.

악마의 본성은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분리시키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람들을 떨어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창세기 때의 아담과 하와 때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마귀는 자신들이 머물렀던 곳을 찾아갑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았어도 이 공간을 성령으로 채우지 못하면 마귀는 무리를 지어서 다시 찾아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께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돼지 떼가 있는 그곳으로 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왜 이들이 돼지 떼 속으로 보내 달라고 했을까요? 교묘한 마귀의 전략입니다. 위기의 순간을 넘기기 위한 작전입니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에 어쩌면 자신들 역시 부정한 존재임의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마귀들은 마귀들린 사람으로부터 나와서 돼지 떼속으로 갑니다.  돼지들은 마귀들이 들어오자 공포에 사로잡혀서 호수를 향해서 달려가 물 속에 빠져 죽어버립니다. 

돼지들이 왜 집단적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갔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마귀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고 마귀들린 돼지들이 악령이 거주하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간 것은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룩함을 피해서 자신에게 익숙한 곳으로 찾아가는 마귀의 모습을 봅니다. 결국 마귀는 예수님으로부터 벗어나 부정한 돼지에게로 그리고 돼지와 함께한 이들은 악령의 소굴인 물 속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그곳에서의 죽었다는 말은 악의 종말은 죽음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러한 일을 체험한 그 마을의 주민들은 예수님께 마을을 떠나가 달라고 청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기 보다는 물질에 더욱 관심을 둡니다. 현상적으로 일어난 일에 이해득실을 따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신앙인들에게 영광인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떠나게 합니다.

하루 하루를 불안과 두려움 쌓여 살아갑니까?  아모스 예언자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제물이 되게 하십시오. 이 삶은 바로  악이 아니라 선을 찾는 삶입니다.’ 하고 예언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삶의 결과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마귀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감사가 넘쳐나고 기쁨이 넘치는 하루 하루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편함과 익숙함에서 떠나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낯 선 곳에서 불편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고자 합니다. 오로지 주님 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하루를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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