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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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20.2.5.)

by honephil 2020. 2. 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나머지 그녀와 혼인하고 싶어 하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데키우스 황제 박해 기간(249-251년)에 순교한 아가타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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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단순히 당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건이기에 그러합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셨지만 몇 가지 외에 다른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것은 손뼉이 마주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 가정 환경, 친인척만 보고 선입견을 가졌고 예수님께 믿음의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우유 시음 실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기자 몇 명이 우유를 마시고 그것이 마치 상한 것처럼 구토를 하자 다른 참가자들도 우유를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하였는데도 말입니다. 우유가 상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 우유의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 우유 자체는 맛과 영양을 지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우유를 마시고 독만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사랑의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손을 통하여 기적의 열매가 맺어질 수 있고, 그 열매는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입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 기적은 무용지물, 더 나아가 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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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믿어라> 
 
복음: 마르코 6,1-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만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의사가 저런 상태에서 베토벤을 죽였다면 그가 작곡한 음악은 하나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느님도 가능성을 열어놓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이 깜짝 놀라는 이유는 ‘새로 태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 동안 나자렛에서 대패질을 하며 사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도 잘하시고 기적도 행하시게 되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기로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물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은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가 믿지 않는 것에 놀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만 믿으면 그 은혜를 주실 텐데 억지로 믿지 않아 그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이런 믿음만이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게 만들고 결국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은 밀떡도 하느님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잊지 맙시다. 그러면 정말 새로 태어나고 고향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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