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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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우리가 어떻게 욕망의 잠, 질투의 잠, 시기의 잠, 분노의 잠, 쾌락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 우리 자신의 문제를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가져가야 합니다.
회당장은 유다인 사회에서 명망 있는 사람임에도 나자렛 목수의 아들 앞에 가서 땅에 엎드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깨닫고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둘째,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가시던 중에 하혈병을 앓는 여인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고쳐 주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회당장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지금 당장 자기 딸이 죽어 가고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립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초조함이 있어도 기다렸습니다.
셋째,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혈병을 앓는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의 죽음을 전합니다. 그 순간 야이로는 시간을 지체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야속하였을까요?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울려 퍼지는 곡소리를 듣고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가 비웃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께서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이 말씀에 소녀는 일어납니다.이제 우리가 일어날 때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져가십시오.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절망과 원망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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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일은 없다.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존재할 뿐이다.>
복음: 마르코 5,21-4
두 장애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은 축구, 레슬링, 권투 등 만능선수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79년 권투 시합에서 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치료를 받고 보조기를 쓰면 혼자서 걸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에게 산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정상에 다다르자, 그는 그를 산에 옮겨 준 친구들에게 잠깐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하고는 숨겨 가지고 온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습니다.
다른 한 청년은 어느 날 불량배들에게 칼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 투지로 노력한 끝에 낙하산 점프의 묘기를 보였고, 특별 장비를 갖춘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혼자서 취사, 세탁, 청소 등을 하며 생활합니다. 그는 또한 휠체어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세 권의 사진첩을 출간하였습니다.
시련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시련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옵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실패로도 이끕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위에 그런 믿음을 줄 사람이 없다면 안 좋은 결말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믿음을 굳건히 지켜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여인과 회당장은 그러나 믿음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들을 만납니다. 하혈병 여인은 처음에 돈이 좀 있었습니다. 돈과 의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전 재산을 다 날렸다면 의사들은 이제 포기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걸린 여인은 포기를 몰랐습니다. 믿음을 저해하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모시고 가다가 믿음이 약한 종을 만납니다. 종이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회당장은 주저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런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믿음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혼자 강한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사람들을 쳐내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끊어버릴 용기부터 있어야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심지어 믿음을 비웃으면 내쫓아버리십시오.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과 가까이하십시오.
미국의 마리온 라이스 하트 여사는 경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경비행기로 그것도 여자가, 84세의 나이로 대서양을 횡단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트 여사가 비행을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2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행을 시작한 이유도 ‘혼자 시간을 때우기에 아주 좋다’는 이유뿐이었습니다. 단순히 비행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많아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규모 있게 보내려다보니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이후로 하트 여사는 ‘나는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세계의 여러 곳을 작은 경비행기로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사가 도착하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환영을 했고 그 때마다 여사는 ‘기진맥진하지만 매우 행복하다’는 소감과 함께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했습니다. 하트 여사의 도전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특별함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불가능하다고 믿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하다 믿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조심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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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주는 평화(마르 5, 21-43)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 34)
자신에게 ‘나는 참으로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하시는 ‘탈리타 쿰’ 하시는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 지에 대해서 질문을 해 봅니다.
털고 일어나는 삶이 그립습니다. 참으로 용기가 필요한 삶인데 가끔은 용기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고 다짐하면서도 주님께 의탁하지 않고 자신에게 의지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고자 다짐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 져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딸아”하고 부르시는 그 말씀이 너무나 다정하게 다가옵니다. 그 순간 동심으로 돌아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집니다. 저 부르심이 바로 저를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열 두해 동안이나 하혈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지만 효력은 없고 오히려 상태만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체험을 많이 합니다. 결국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 여인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빛을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은 수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계십니다.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대단합니다. 앞으로 다가갈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는 굳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 여인이 생각하는 구원은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는 의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에게서 힘이 빠져나간 것을 깨달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 부인은 두려워 떪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주십니다. 구원은 바로 평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의 조건은 바로 그 여인에게 있어서는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는 말씀으로도 충분한데 이렇게 길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묵상해 보면, 평화와 육체적인 치유입니다. 즉 그녀는 몸과 마음 모두가 치유가 되었습니다. 바로 전인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앞에서 여인이 기대한 구원이 육체적인 치유였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몸과 마음의 치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회당장에게 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십니다.
소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와 하느님의 언어는 다릅니다. 죽은 것이 자는 것이고 어쩌면 자는 것이 죽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쨌던 예수님께서는 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말은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소녀는 죽음을 털고 즉시 일어나 걸어다닙니다. 죽음마저도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세 제자는 목격하게 됩니다.
앞에서의 ‘구원’과 ‘죽음에서의 일어남’은 같은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탈리타 쿰’ 무엇으로부터 일어납니까? 우리를 죽음에로 이끄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금 이 순간 일어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탈리타 쿰”에 응답하는 하루,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실천하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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