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연중 제3주간 토요일 (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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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연중 제3주간 토요일 (2020.2.1.)

by honephil 2020. 2. 1.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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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수녀님이 수녀원 입회 25주년을 맞아 소감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입회한 날 저녁 식탁에 사과가 있었습니다. 각자 사과를 반쪽씩 먹었는데, 수녀님은 사과를 더 먹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봉헌의 삶을 살고자 수녀원에 들어왔는데, 그까짓 사과 반쪽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녀가 된 지 25년이 지났으니 제가 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입회할 때처럼 저는 여전히 그 조그마한 것에도 마음을 빼앗긴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입회할 때에는 그런 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러한 저를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들으며 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전히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부족함이 많지만, 이러한 저 자신을 예전보다는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저 자신과 타협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권능을 더 깊이 헤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생각해 보면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센 돌풍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호들갑을 떨었던 제자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넘실대는 파도를 넘어 하느님의 품을 향하여 항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와 함께 그 길을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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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내 안에 잠든 예수님을 깨워라>
 
복음: 마르코 4,35-41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가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를 불안과 공포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깨워주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왜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배는 몹시 흔들리고 물이 들이차는 상황이라 억지로 자는 척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계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을 부르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것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아의 욕심입니다. 나의 힘만으로 무언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도 어떤 때는 명예욕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다 빼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우리 각자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이 빠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을 좋아해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이 아니라 믿고 그 여자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인지라 다시 한 번 청원해 보았습니다. 그때 수락하여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만약 그 여자를 잃는 두려움 때문에 10년 동안 쫓아다녔다면 그만큼 감정의 고통을 겪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았기에 10년을 평화로이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맡긴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가라앉히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겁을 내는 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잃으면 잃는 것이고 얻으면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해는 염분이 많아서 몸이 절대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해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하는 수칙은 뜨기 위해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몸을 움직이면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눈에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수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튀어 눈에 들어가면 엄청 아픕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필립 1,21-24 참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뺐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이 경지까지 가기는 힘들지라도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오늘 복음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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