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1-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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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을 비추는 등불처럼 신앙인들에게 이웃과 세상의 참된 모범으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강조되고는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등불이 빛으로 주위를 비춘다는 사실에만 치우쳐, 그 등불 자체가 빛을 낸다는 고유한 성질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등불은 그 자체로 빛납니다. 빛은 빛을 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비추지요.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 때문도 아니고, 다른 이를 비추어야 한다는 희생 때문도 아닌, 그저 등불이 등불로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더 많은 빛이 널리 퍼져 나갑니다. 이런 논리가 오늘 복음 마지막 구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더 가지려고 하다 보면 제 본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위험에 빠집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고 자신의 고유함을 되짚어 보며, 나 자신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르고, 그 다름으로 나는 이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사유하는 데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잣대를 따르기보다, 각자의 고유하고 소중한 모습을 제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 나가는 길, 그것이 신앙이고,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곳에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과 동행하려면 내가 허투루 보내는 나의 시간과 공간을 먼저 챙겨 나가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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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더 배우려면 이젠 가르쳐라!>
복음: 마르코 4,21-2
케네디 대통령은 중요한 연설을 앞두고 항상 원고를 외우고, 거울 앞에서 예행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대목에서 톤을 높여야 할지, 또 어떤 몸짓을 써야 할지를 미리 정하고 그대로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시각은 많은 정보를 동시에 입수하고, 의식하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성공체험을 마음속에 그려 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하는 사이에 기억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것은 학습과 같습니다. 똑같은 장면은 물론이고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을 때 마음과 몸이 반응해서 집중력을 높입니다. 불안감은 해소되고 성공체험만이 뇌 속에 그려집니다. 케네디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 훈련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며, 청중들이 열광하는 장면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이런 예행연습을 통해 케네디는 자신감을 갖게 되며, 이미 성공을 예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과 청중의 반응은 이미 자신의 뇌 속에 깊이 각인 되고, 이 장면은 연설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읽은 것의 10%, 들은 것의 20%, 본 것의 30%를 기억합니다. 보면서 들은 것은 50%를 기억합니다. 들은 것의 20%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남에게 말하며 가르치면 80%를 기억하고, 행동하며 말하며 가르치면 90%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선생님이나 교수는 물론 대중을 상대로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나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이나 군의 지휘관들은 참모와 휘하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며 가르치면서 자신의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면 돈 벌어 가며 자기 공부를 하는 셈이니 일석이조가 아닐까요?
[출처: ‘가르치면서 배운다’, 이인수, 들판, 다음 블로그]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
우리 모두는 스승이 되도록 파견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역할을 할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가르치려 들면 교만하고 버릇없다고 핀잔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는 것마저 잊어버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기회를 노려야합니다.노려야 합니다. 선생님이라고 항상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실에서 들을 자세가 된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런 상황을 노려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모든 이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적당한 때, 적당한 상황이 눈에 들어오고 그때 가르치면 됩니다.
가르치면 무엇이 좋을까요? 더 많이 알게 됩니다. 많이 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기 때문에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땅에 대해 말씀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말씀의 씨가 땅에 뿌려져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누군가가 따먹어야합니다. 바로 이웃이 따먹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아 나의 삶을 바꾸어놓은 진리가 있다면 그 열매를 이웃에게도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나에게서 맺은 말씀의 열매를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30배 맺히던 것이 60배, 100배가 맺게 되겠지만, 전하지 않으면 다시 세상 욕심과 육체의 욕망, 혹은 교만에 사로잡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으로 전락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완전하지 못할 때도 제자들을 계속 파견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더욱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워야 합니다. 배우기만 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혼자 수련을 한다고 해도 깨달음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르치면 어렴풋하게 알던 것을 명확히 알게 되고 또 모르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 알려주십니다. 더 가지려면 더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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