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연중 제1주간 월요일 (20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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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연중 제1주간 월요일 (2020.1.13.)

by honephil 2020. 1. 13.


오늘의 복음 말씀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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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드러난 종말의 완성입니다. 종말은 저 멀리 떨어진 꿈같은 시간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의 결단의 자리에 있습니다. 종말은 기다릴 실재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 그래서 급합니다. 우리의 결단이 급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을 학자들은 ‘급한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종말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재촉하는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에는 ‘곧바로’, ‘즉시’라는 표현들이 넘쳐 납니다. 제자들도 급하게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사는 고귀한 이들이 아닙니다. 고기 잡고 그물 손질하는 이웃집 아저씨들, 그들이 제자가 된 이유는 바로 ‘급하게’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종말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못나고 부족하여 내세울 것 없어도, 우리는 지금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르기 위하여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어찌하면 예수님을 더 잘 따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의 나로 여기에 머물러 있나?’ 하는 질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따르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제자 됨을 영웅담으로 분칠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지금,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금, 나를 다시 한번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에 저당 잡혀 살아가는가 …….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신 분이시지, 우리에게 저만치 오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계십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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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3일 월요일

믿음과 선택 (마르 1, 14-20)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자신의 권리는 중요시하면서 타인의 권리는 무시하는 극도의 이기심이 팽배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권리는 주장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사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선택의 연속입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결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에 이런 말이 유행합니다. ‘선택 장애’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판단을 빌려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선택의 책임은 자기에게 귀속되지만 참고의 대상이 결정해 주고 책임은 자신이 지는 불행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선택을 강조하십니다. 언제나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시기만 되면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지만 세상적인 이해와 신앙생활이 겹치게 되면 먼저 놓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그래도 많이 고쳐졌음을 느낍니다. 신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 탓일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 16)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야고버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그들도 부르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왜 이들을 뽑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관습으로 보면, 어부는 참으로 천대받는 직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3D 업종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좀 더 능력이 있는 사람들 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스펙이 화려하고 겉으로 드러난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뽑으신 이유는 바로 그다음 문장에서 깨달을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합니다. 이 부사 ‘곧바로’는 어떠한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복음서의 말씀대로 이해한다면 이들이 전에 예수님을 만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이 잡히고 난 뒤에 갈릴래아에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이 복음 선포의 말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그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를 들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순간의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직업마저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겠습니까.


상황이 어쨌든 부르심은 예수님의 절대 권한이고 이에 대한 응답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부르실 때 예수님의 마음과 이들이 예수님을 봤을 때 예수님에 대한 신뢰의 마음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서로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으로 답할 수가 있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그 복음의 말씀이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실 때 이들의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의 마음을 보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새로운 삶을 향한 열정의 표현일 것입니다.

 

이들이 굳이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갔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과 가족을 포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놓는 것은 하느님의 더 큰 축복의 약속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마태복음 13:45)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진주를 찾는 이 상인이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진주 만을 찾는다는 것처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진주이신 예수님 잡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최선을 다하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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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르 1,17-18)

오늘 복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말이 있습니다. 두 번이나 나오는 ‘곧바로’라는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실 때 그들은 ‘곧바로’ 응답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에도 이 둘 역시 ‘곧바로’ 그물을 버립니다.

사실 다른 복음과 달리 마르코 복음에서 이 낱말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수는 무슨 일에서나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족제비가 울타리 구멍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닭장을 노려보았습니다. 철수는 눈을 부릅뜨고 족제비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이놈, 우리 집에 들어오기만 해 봐!” 족제비는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타리 구멍을 통과해 닭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철수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습니다. “족제비 이놈, 닭장에 들어가기만 해 봐라.” 족제비가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닭장 안에 들어가자, 철수는 몹시 화내며 말했습니다. “저런 겁 없는 놈을 봤나? 닭을 물고 가기만 해 봐라.” 그러나 족제비는 닭을 낚아채 울타리 구멍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족제비가 멀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철수는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답니다. “저런 나쁜 놈 같으니! 다시 나타나기만 하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철수처럼 ‘다음에 하자’, ‘내일 하자’, ‘여건이 되면 하자’ 하며 미루는 일이 많지 않은지요?

예수님께서는 순간순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지 못한 채 미적거리는 동안, 그 부르심에 담긴 소중한 선물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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