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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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사라집니다.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중심으로 함께 등장합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대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하게 합니다. 뜻이 맞아 서로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경우와, 뜻이 달라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함께하는 기쁨을 가져다주고, 후자는 함께하는 것이 경쟁이나 대립, 또는 질투의 감정을 불러오고는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경우일까요?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와야 할 곳은 ‘여기’이지, 예수님께서 계시는 ‘저기’가 아니라는 그들의 시선에서 경쟁과 질투로 얼룩진 적개심마저 느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질타하기보다,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이 기쁨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결합을 상징하는 혼인에 빗대어 해석되기도 합니다만(호세 2,19-20; 에페 5,31-32 참조), 오늘 복음은 신랑과 신부의 결합보다 신랑의 등장에 대한 기쁨에 집중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등장을 기뻐합니다. 유다 전통에 따르면, 신랑의 친구 가운데 믿을 만한 친구 둘이 신랑과 신부의 결합을 지켜봅니다. ‘신랑의 목소리’는 신랑이 신부와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포와 같습니다. 신랑의 친구로서 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친교를 기뻐하는 셈입니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그르다는 생각에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오늘의 세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보여 주는 경쟁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일에서조차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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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2-30)
장충동하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것 하면 족발입니다. 오장동 하면? 함흥냉면이죠. 신당동? 당연히 떡볶이!! 그런데 고민입니다. 그 동네, 그 골목 가면 족발에 한잔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한단 말인가. 간판에는? 죄다 내가 ‘원조’라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뚱땡이 할머니 집에 가야 하나 욕쟁이 할머니 집에 가야 하나, 60년 전통을 내세운 집에 가야 하나 인테리어 깔끔한 집이 나을까? 원조 타이틀을 두고 경쟁이 치열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세례에 대한 권한이 바로 우리에게, 세례 운동을 통해 이스라엘의 부패한 종교와 사회를 개혁 쇄신하고자한 우리에게 있는데 감히 원조인 예수님께 세례를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인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노라고. 이거야말로 명백한 저작권 위배 아니냐고 말이죠. 게다가 더 그들을 흥분하게 하는 것은 원조집보다 옆에 새로 신장개업한 집으로 더 손님이 몰리고 있으니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죠. 요한의 제자 입장에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보다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옆집 족발집, 바로 옆에 신장개업한 것도 괘씸한데 심지어 원조는 점점 쇄락하여 파리 날리고 우리에게 레시피 배워나간 후발주자 집이 우리 집 바로 옆에서 문전성시라니.
복음은 이 대목에서 슬쩍 한 구절을 끼어 넣고 있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마치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실은 사정은 그렇습니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예언자입니다. 그가 사라지면 이제 하느님의 새로운 시대, 예수님의 시대가 펼쳐기게 될 시점입니다. 요한은 이 사태를 명징하게 정리합니다. 그는 자기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죠. 비록 내가 열었지만 이제 모든 권한은 그분께 넘어갔다는 것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습니다. 요한에게 자기 임무와 역할을 알고 있음으로 아무런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신랑의 친구로 자처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유다의 혼인 풍습에서 당연히 당사자인 신랑이 중요하지만 신랑 친구의 역할도 나름 중요합니다. ‘쇼쉐빈’이라 불리는 이 신랑 친구의 역할은 결혼 준비가 다 마쳐지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정중하게 신랑 집으로 모셔오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첫날밤을 치를 때까지 기다려 이 결혼이 완료되었음을 선언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친구인 신랑을 위해 많은 수고를 감당하지만 친구를 위한 일이기에 기쁘게 해 나가는 우정이 있는 것이죠.
하느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 옳습니다. 요한의 기쁨은 자기 사명의 성과나 완성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요한의 진정한 기쁨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는데서, 드러나는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성취감에서 오는 뿌듯함에서 오는 기쁨이 아닌 신랑이 드러날 때 갖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하지만 우리 기쁨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결핍이 채워지고 무언가 더해져서 내가 만족하는 그것도 기쁨이겠지만 기쁨의 기준과 근거, 중심이 다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친구인 신랑의 높아짐과 드러남이 내 기쁨이 되는,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 기쁨이 넘쳐나기를 그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 honephil의 생각 ||||||||||||||
오늘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왠지 저에게는 좀 다가오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읽다 보니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이른바 필이 꽂혔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활동하고 있는 성가대에서의 일들이 떠 올랐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잘하는 것 같고, 또 누군가 솔로를 하면 괜스레 마음이 편치 않고, 거기다가 혹여 그 친구가 실수라도 하면, 거봐 잘하지도 못하는데 시켜서 전례를 망치는 거야 등등의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곤 합니다. 내가 더 잘 할거 같고, 적어도 그런 실수는 안 했을 텐데 등등 이런 걸 시기 질투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데 이러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다 똑같다는 것을 하루하루 살아가다면서 체득하게 됩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 이 분도 그러한 감정이 없었을까요? 그렇지만 복음 어디에도 그런 행동을 했다는 곳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그런 감정을 부추기는 제자들을 타이르기까지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를 직접 실천하신 것입니다.
흠 많고 부족한 우리 인간을 언제나 사랑하시는 그분은 진정으로 커지셔야 하고 우리는 한없이 작아져야 합니다.
오늘도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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