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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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주님 세례 축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3-17)
그리스도교 신자로 입문하는 성사인 세례는 형식상으로 보면 어쩌면 너무 간단하기조차 합니다. 그저 이마에 깨끗한 물을 성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붓는 것뿐입니다. 6개월 내지 길면 1년, 짧게는 외짝 교우 교리반이라고 한 달 내에 단기 속성으로 예비자 교리 과정을 거쳐서 기도문도 외우고 미사 참례 확인 도장도 받고, 그리고 세례명과 대부모도 정하고 그렇죠. 보통 성인 세례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준비됩니다. 그리고 가슴에 코르사주 달고 한껏 꾸미고 설레는 마음으로 세례식이 봉헌됩니다. 세례식 순서에 예비자 도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관한 문답이 있습니다. 예비자 성유를 바르고 세례가 베풀어지고, 크리스마를 이마에 바릅니다. 새로운 탄생을 상징하는 흰옷 입는 예절이 있고 초를 밝혀 건네줍니다. 세례 예절 하나하나에는 이천 년 교회의 전통이 담겨있죠. 오랜 역사적 흔적들이 반영된 예절입니다.
그런데 가끔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일단 대부모가 세례식에 맞춰 시간 내에 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갑자기 옆에 있는 다른 분이 대부모가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구역이나 레지오에서 대부모를 수소문하는 때가 많은데, 난생처음 보는 분이 갑자기 쌍둥이 아빠, 세 쌍둥이 엄마가 됩니다. 그래서 정작 세례 문서에 오른 대부모가 실제 대부모 하고 다른 경우가 있어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세례명도 그렇습니다. 제가 예비자 교리를 얼마나 잘했는지 글쎄 우리 반은 전부 형제들은 라파엘, 자매들은 라파엘라로 하겠답니다.^^ 하여간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당사자의 이름표를 확인해야 하는데 여태껏 줄줄이 라파엘이니, 그냥 확인 안 하고 ‘라파엘에게 세례를 줍니다’하고 물을 부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중 한 명은 특이하게 보나벤뚜라였던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그냥 그분은 라파엘이 되고 맙니다. 한번 줬으면 그만, 한번 물 부으면 끝이라 취소가 안됩니다. 보나벤뚜라이려 했던 라파엘이 되죠.
기름 바르는 예절, 도유도 그렇습니다. 솜에 예비자 성유와 크리스마가 묻혀 있죠. 그런데 한 명에 솜뭉치 하나씩 쓰지 않습니다. 한번 손가락에 묻혀서 여러 명에게 바릅니다. 그런데 세례식 날 대부분 메이크업을 완전 신부화장 수준으로 하시잖아요. 이마에 파운데이션, 비비크림 폭탄입니다. 그래서 몇 사람하고 나면 뒷사람은 성유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앞사람 화장품을 바르는 격이 됩니다. 물 부을 때도 마스카라 번져서 가끔 무섭습니다. 시커먼 물이 뚝뚝 흘러요. 심지어는 물을 너무 듬뿍 과감하게 부어서 물바다 되는 사태가. 흰옷 입는 부분에서는 미사포를 사용하죠. 자매들은 그렇다 치고 남자들은 미사포를 씌우면 영 이상스럽습니다.
하여간 자 이렇게 세례가 베풀어줍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세례 예절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은 세례를 베풀기 위한 준비이거나 세례의 의미를 더욱 명백하게 드러내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위급한 상황에 베풀어지는 대세의 경우 그래서 물을 붓는 것만으로도 유효한 것이 되곤 하지요. 그러나 어찌 보면 베풀기에도 쉽고 받기에도 쉬운 세례는 만만하고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사람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겠노라는 서약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세례는 유효했지만 글쎄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밖으로 올라오실 제, 주님 위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고 그 모습을 예수님이 친히 보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들과 인생들을 죄와 삶의 질곡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청년 예수로 삼고 당신의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주님의 세례의 의미라는 것이죠.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이제부터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받으신 세례를 통해 그 당시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사상과 아주 다르게 겸손과 고통으로 가득 찬 메시아로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명을 의식하시고 비록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멸시를 받아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들에게 오직 사랑과 자비를 베풀도록 당신을 부추기시는 성령님이 당신 안에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사명을 부여해주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딸로서의 사명, 일꾼으로서의 사명, 1 독서에서 이사야서가 말하는 주님의 종으로서의 사명! 그렇게 내가 받은 세례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 세상을 위한 것, 백성의 계약이 되고 민족의 빛이 되기 위한 것이고 보지 못하는 이들과 갇힌 이들과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한 세례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그런 세례를 받았다니요. 세례가 너무 개인화되어 이해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세례 받기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 이후가 중요한 것이기에 그렇죠. 주님은 세례 이후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두루 다니시면서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2 독서 사도행전의 증언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요르단강 물에서 일어나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십니다. 비둘기처럼 파닥거리면서 내리셨는지 툭 떨어지시듯 내리셨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세례로 시작된 그 사명을 위해 뭐가 필요한 것인지를 명백히 하죠. 그 사명은 성령의 힘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이죠. 자기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야서가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신 이에게 나의 영을 주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 약속입니다.
예식은 잠시의 시간만 할애하면 되기에 간단할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영속적이기에 지난합니다. 더구나 이 약속은 취소 불가능! 인간 사이의 약속이 아니라 하느님과 체결한 계약이기에 그렇습니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깨기 위해 있는 것이라지만, 하느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이 약속은 파기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나를 지켜줍니다. 세례 받은 이로서 맺은 약속이 나를 유혹에서 지켜내고, 나를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나를 구원의 길로 재촉해 나갑니다. 갑자기, 내가 받은 세례가 무서워지지 않으시나요. 내가 뭘 받은 것이죠.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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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었고, 죄를 씻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이해됩니다. 죄를 씻기 위하여 우리는 죄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고해소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되돌아보는 일은 꽤나 아픈 일입니다. 고백하건대, 지난 과오를 진정으로 뉘우쳐서 아프기보다 그 과오 때문에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더 아픕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예언자 시대부터 ‘의로움’은 하느님과 제대로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대개 계층 간에 벌어지는 갈등의 자리에서, 권력의 다툼 안에 희생된 약자들의 자리에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집중하시는 곳은 아픔과 슬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신앙인들이 일상에서 만나고 웃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되돌아봅니다.
의로움을 이루려고 만나는 자리가 있을 수 있고, 죄를 씻기는커녕 서로의 탓을 곱씹느라 죄 속에 허덕이는 피폐한 영혼들을 맞닥뜨리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끝은 이렇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그 아들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져도 말 한마디 없이 죽어 가는 고난 받는 종이 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하여 대신 죄를 짊어지는 희생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죄를 짊어지우는 일만큼은 줄여야겠습니다. 의로움은 특정한 상황에서 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실천으로 실현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범한 일상에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자신을 비워 내고, 내어 주고, 참아 주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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