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2020.1.10.)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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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이라는 병을 육체적 결핍으로만 보는 시선은 잠시 접어 둡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놀라워하며 초인적 능력이라 칭송하는 마음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나병을 겪는 이의 마음에 머물러 봅니다. 세상의 손가락질보다 더 힘든 것은, 자신의 모습과 화해하는 일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나병 환자는 낫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 자기 자신의 회복에 예수님의 마음을 초대합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는 도대체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는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마음에 의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 예수님께서는 끌고 가시는 지도자가 아니라, 함께하시는 동반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시기보다 우리의 마음속 이야기를 먼저 듣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제 이야기를 터놓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터놓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려 눈치만 느는 것이 세상살이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유다 사회도 사제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윤리와 법률을 다듬고 보존하고 되새겼습니다. 다만 공동체의 윤리와 법률에 어울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거부와 차단만이 주어졌지요. 말하자면, 윤리와 법의 이름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닫혀 있어 서로 단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사제에게 보여야 하는 것은, 깨끗해진 몸이 아니라 다시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몰골로도, 이런 나약함에도, 이런 비참함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를 소중히 여겨 주는 또 다른 마음을 얻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는 따뜻한 복음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함께하는 마음이라 늘 따뜻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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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루카 5,12-16)
치유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이 만천하에 들어나는 것, 불치라고 여겨지던 병을 고치심으로써 당신이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분임이 드러납니다. 사도들이 펼쳐나간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도 사도들이 보여준 치유는 예수님의 권능을 부여받은 정통성의 실제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면 지금 교회는? 사도들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사제들은? 답이 참 궁합니다. 무슨 기적을 일으켜야만 우리가 제대로 된 교회이고 예수님의 일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죠. 다만 주님이 고치셨으면 우리 역시 고통을 덜어주고 고통을 해결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말만으로의 위로, 그저 영혼만 지켜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겪는 온갖 고통에서 막연하게 대처하지 않으셨던 것이죠.
오늘 주목할 점은 예수님은 치유된 나병환자에게 다만 사제에게 가서 모세가 명한대로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구약에 악성 피부병을 앓았다 치유된 이들에 대한 규정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공동체에서 축출된 이를 다시 정결한 이로 공적으로 선언하여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사제는 정결하게 되려는 그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향백 나무와 다홍실과 우슬초를 가져오도록 지시한다. 사제는 또 옹기그릇에 담긴 생수 위에서 새 한 마리를 잡도록 지시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살아 있는 다른 새와 향백 나무와 다홍실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이 물건들과 살아 있는 새를, 생수 위에서 잡은 새의 피에 찍어,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가 정결하게 되려는 이에게 일곱 번 뿌린다. 그런 다음 그를 정결한 이로 선언하고, 살아 있는 새를 들로 날려 보낸다.’ ( 레위 13,4-7)
규정은 이렇습니다. 새 두 마리가 정한 예물입니다. 그래서 그 새 중에 한 마리를 옹기 그릇에서 잡습니다. 그 피를 환자의 환부에 뿌립니다. 그리고 한 마리는 들로 날려 보냅니다. 새 한 마리의 희생으로 다른 한 마리는 살아납니다. 이상한 규정이죠. 그런데 신약 시대 예수님에 의해 이 이상야릇한 규정의 의미가 비로소 밝혀집니다. 교부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옹기그릇에서 새를 잡습니다. 희생된 그 새는 누구인가?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새를 어디서 잡습니까? 옹기그릇입니다. 옹기그릇은 깨지기 쉬운 존재, 곧 사멸할 존재인 인간, 바로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바오로도 인간을 질그릇 같은 존재라고 불렀던 것이 그것이죠. 그래서 옹기그릇 속에서 희생된 새는 연약한 사람이 되시어 피를 흘려 죽음을 겪은 예수님의 희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 새가 희생되어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른 하나의 새는 살아서 날아갑니다. 곧 예수님이 마치 나환자 같은 영적으로 죽은 생명을 위해 이 땅에 옹기그릇처럼 오셨고 그 안에서 죽고 그 죽음으로 한 마리 새는 자유롭게 되어 훨훨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환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바로 그것,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아나고 자유롭게 해방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치유는 불치의 병에서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일하심이지만, 그것은 이제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마치 새 한 마리의 희생을 담보도 다른 새가 살아나듯 우리가 그렇게 살아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되었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아픈 죽음으로 인해 죽어야할 이들이 새롭게 되고 자유롭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었음입니다. 그것이 와 닿으시나요. 하느님 아들의 희생, 인간을 위한 아니 나를 위한 그 희생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지 절절하지 않다면 그 희생은 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치유의 기적을 행하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는 있지 않나요. 티도 나지 않는 일,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좀 하면 안 되겠느냐고 복음은 자기중심에 사로잡힌 우리들에게 촉구하시는 것이죠. ‘희생’이야말로 예수님 사랑의 절정이었으니까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
||||||||||| honephil의 생각 ||||||||||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동방박사들이 그 분의 오심을 경배하러 온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이며 내일이 지나면 이제는 성탄 시기가 끝나고 연중 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탈무드의 얘기중에 두 사람이 탄광에 갔었는데, 한 사람 얼굴은 깨끗한 반면 한 사람은 얼굴에 검댕이 묻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 중 먼저 얼굴을 씻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물론 요즘은 거울이 보편화되어서 거울을 본 사람이 먼저 얼굴을 씻었겠지만 당시는 아마도 그렇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그렇기에 실제 얼굴에 검댕이 묻은 사람보다 그런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자기 얼굴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우선 얼굴을 씻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가끔 우리는 나의 실수나 잘못 보다는 남의 그런 모습을 잘 보게 됩니다. 난 잘하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지. 그런데 오늘 이 탈무드의 얘기를 생각해보면 세상 이치가 또 그렇지 않은 거 같습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나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의 허물이나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면 그걸 창피해하고, 숨기기보다는 고치려는 마음의 자세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도 평화가 함께하시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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