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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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2020.1.3.)

by honephil 2020. 1. 3.

오늘의 복음 말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약 시대부터 더듬어 보아야 할, 꽤나 무겁고 중요한 표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탈출 12장 참조), 어린양의 피로 하느님께 ‘생명’을 보증받았습니다. 피가 생명일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었고, 그 희생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는 여정의 어려움에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은 이사야서 53장에서도 나타납니다.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빗대어 묘사됩니다. 죽어 가면서도 침묵하는 그 침묵은, 다른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진 주님의 종의 희생을 상징하는 격조 있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린양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살리는 어린양의 겸손과 희생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자, 예수님의 삶 자체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을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낮은 자리에 먼저 찾아드는, 그래서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사랑입니다. 더불어 살기에는 너무 심한 경쟁에 내몰린 오늘, 우리의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사랑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 세상에 묵묵히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걸어오시는데, 우리는 그저 하늘만 쳐다보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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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요한 1서 2,29―3,6
요한 1,29-34

<나는 그분을 위해 기쁘게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다가오시자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위 문장에서 우리는 특별한 단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세상’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질서’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코스모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의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의 그릇된 질서입니다. 
위의 세상이 아니라 아래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 세상은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결국 극복되어야 할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때가 이르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세상이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세상의 죄’는 결국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며 자만심입니다. 
세상의 죄는 인간 각자의 개인적인 죄를 넘어서는 죄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분을 적대시하는 세상의 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인류, 상처 입은 인간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 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어린양 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는데, ‘없애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치워 버리다.’는 일차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보다 깊은 뜻은 ‘짊어지다.’입니다.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 인간 각자의 죄, 세상의 죄, 집단적이며 구조적인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라 외치며, 머지않아 우리들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짊어진 후, 묵묵히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어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암시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돌아보니 저도 젊은 시절 보따리를 쌀 때마다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내가 떠나면 나만 바라보던 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데, 내가 가버리면 이 시설이 과연 제대로 운영이나 될 수 있을까? 
저 많은 후원자들 다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몇 년 뒤에 슬쩍 그 소임 지를 가봤더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 없는데도 다들 환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공연히 부질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honephil 생각  |||||||||

 

오늘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며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보면서 어떻게 무슨 근거로 그렇게 얘기할 수 있었을까 혼자 상상해봅니다. 

최근 모 방송의 토론을 보다 보니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에 따라 이에 맞는 정보만 주목하며 그 이외의 것은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것으로, 이른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편향(bias)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탈진 면에 수평의 토대를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세워진 집처럼 위태로운 것입니다. 거기다가 객관적이고 과학적 토대가 없는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면 이는 정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탈진 곳에 집을 지을 때는 먼저 토대를 최대한 수평되게 만든 후, 그 위에 그 위에 집을 올려 세웁니다. 그래야 그 집이 안전하게 오랜 세월 동안 버틸 수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구 상에 서 있는 모든 구조물이 이렇게 서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고 얘기했을 때, 요즘처럼 확증편향이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오늘 저는 이 질문이 자꾸만 제 맘속에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이것이 정말 우리가 말하는 합리적 의심이었을까요?

 

오늘도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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