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0.1.2.)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0.1.2.)

by honephil 2020. 1. 2.

복음 말씀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19년 1월 2일 목요일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요한 1,19 - 28)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 27)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당시에 엄청난 세상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며  주님의 길을 준비해야 하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와서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까?’ 하고 질문할 때 그는 단호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하고 대답합니다.  당시에 요한이 누렸던 세상적인 인기를 생각한다면 ‘내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하고 대답을 하여도 의심할 사람이 없었던 그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이를 단호하게 부인하는 것입니다. 비움과 겸손의 삶을 살아갔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한 우리의 준비는 바로 ‘겸손’ 임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누구냐?”하고 질문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나 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에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교만은 자신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은 자신 만을 보게 하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을 하는 척’을 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 하는 척’과 같은 연기를  잘하는 것이 세상적인 출세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벤튼이라고 하는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기의 출발점에 대해서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가 이러한 연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행복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연기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연기하는 삶에서 나는 행복한 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복이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적인 것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에 따라서 행복의 기준이 너무나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의 기준을 확인함에 있어서 오늘 예수님께서 “너는 누구냐?”하고 저에게 질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자신에게 다가와 ‘당신이 누구냐’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감춤도 없이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잘 이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연인 뒤에 오시는 분이 더욱 잘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더욱 나아져야 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뒤에 오시는 분이 너무나 크신 분이시기에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주연이 되고 싶어하는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빛보다는 어둠이 돋보이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둠이 짙고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고 하더라도 빛은 이기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을 바라볼 줄 알기에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갑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음으로서 나가 세상에 던져진 이유를 잘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다가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환기를 시켜 주십니다.  너의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심을 확인하며 이를 실천하는 거룩한 하루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삶을 살아갔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잘 맞기 위해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이 주인이 되는 삶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삶의 방법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삶이고 성모님의 삶입니다. 목적이 분명한 삶,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투신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내 삶의 주인이신 그분께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이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고 내 자신을 주인이신 주님께 내어놓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성모님의 삶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

 

1월 2일 목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6-27)

사람들은 흔히 샛별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새벽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새벽별은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별이 아니라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별이 하나둘 사라질 때 밤하늘을 지키다가 마침내는 붉은 해에게 건네주고 자신은 말없이 사라지는 별이 새벽별입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6월 24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가장 길었던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탄생 시기는 밤이 가장 길었던 동지에서 낮이 점점 길어지는 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도 자신의 탄생 시기가 갖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앞서 닦아 놓고 자신은 점점 작아집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 생길만도 한데, 오히려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심지어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스스로 낮춥니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해에게 말없이 자리를 내어 주는 새벽별 같은 사람,

끝까지 변하지 않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며 남에게 공로를 돌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게 바뀔 수 있습니다.

전숭규 신부

 

 

 

||||||||||||||||||| 오늘의 단상 ||||||||||||||||||||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것으로, 주제는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살아가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를 목도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 이 겸손이 부족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좋은 기회가 오면 다 자기가 잘해서, 무슨 일이 잘되면 사장인 내가 잘해서, 그러다가도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하며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겸손의 자세,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의 충직한 종이고자한 세례자 요한의 자기 선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가끔 삶속에서 무조건 자신 만을 낮추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론 어떤 이의 의견과 다른 것을 주장하여 그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이런 기도를 마음속으로 해 봅니다. "주님,당신 뜻을 따르게 하소서,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지혜를 허락하소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