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묵상 ]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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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 오늘의 묵상 ]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2019.12.28.)

by honephil 2019. 12. 28.

복음 말씀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마태 2장 13-18)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 13)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을 보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면들이 있습니다. 이성의 눈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만이 해석이 됩니다.


오늘 저희들이 들은 이 복음 말씀 역시 이러한 구원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 때문에 수 많은 죄없는 아이들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구원하러오시는 예수님이 오히려 죽음을 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죄 많고 당시의 정권에 저항하던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죄 없는 무수한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두고서 하느님을 믿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기 보다는 이성으로 다가 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난 수 있게 하시느냐고 질문합니다.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사에서 일어나는 비 합리적인 사건의 이면에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들 자신이 만든 역사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악에서 나온 학살인 것입니다. 헤로데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2살까지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꿈에서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가 들려주는 말입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꿈을 통해서 드러남을 봅니다. 이 꿈은 일반적인 보통 꿈이 아니라 계시적인 의미의 꿈입니다. 이 꿈은 점을 통해서 보는 미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 일방적으로 특별한 때,  특별한 방법으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하실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경건한 생활과는 관계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오심’과 ‘떠나심’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의 혼재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는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만이 가능한 지혜입니다.

무수한 죄없는 아이들이 학살 당하는 사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능력 함을 보지만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눈으로 본 하느님의 무능력 함이 바로 당신의 구원의 역사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확장되어 가는 계기가 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그 이유가 ‘하느님의 무능력 함’에 기인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피신이고 패배였지만 이 피신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확장이고 승리였슴을 깨닫게 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 20) 는 요셉의 말이 이 사건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저질러진 죄없는 아이들의 죽음이 지금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생명의 씨앗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적인 어리석음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죄없이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죽어간 어린 아이들이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슴을 알게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무고하게 죽어가는 이 시간들 안에서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자신의 노력을 더하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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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주신 말씀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3-18)

살다보면 내가 억울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억울합니다. 사랑하였는데 왜곡된 사랑이 돌아올 때도 억울합니다. 노력하였는데 나만 못살고 있다고 여겨질 때 억울합니다. 나만 병이 걸려서 아파하고 있을 때도 꽤나 억울합니다. 겪을 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한다면 고통스러운 일도 견딜 수 있지만,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통은 더욱 힘겹기 마련입니다. 이유가 없지 않지만 우리로서는 그 이유를 다 알 길이 없습니다.

헤로데 치하에서 억울하게 죽은 순진무구한 아기들, 그들이 그곳에서 그 즈음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죽음은 정말 억울하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아무리 고통은 신비라고 하고, 하느님의 대업이 이루어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장면을 묵상할 때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피어나지도 않은 꽃과 같은 존재들이 스러져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너무 부조리한 것이고 인간이 죄악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억울한 죽음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억울한 일들이 예수님 탄생 즈음의 그 어린아이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지요.

 
헤로데는 자기 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죽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불의하게 권력을 탐하면 애꿎은 죽음을 가져옵니다. 이 어린이들의 죽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예표라고 말하거니와, 예수님도 권력에 의한 희생자로 골고타에 오르신 것입니다.

가장 약한 생명, 자신을 방어할 아무런 힘도 없는 생명마저 탐욕의 제물로 만드는 죄악의 모습을 성탄 시기에 묵상하면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무자비한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이들, 잔인한 도륙이 정당화되는 일이 세상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태연하게 자행되는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 착취와 성노예화도 우리는 목격합니다. 겉으로 화려해보이는 이 세상 이면에 여전히 존재하는 억울하고 부당하기 짝이 없는 죄악의 참상들을 바라보도록,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죠.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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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방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을 없애려고 헤로데가 살해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공경합니다. 어떤 옛 교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기들은 말도 배우기 전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아기들은 싸울 줄 모릅니다. …… 그럼에도 이미 순교의 가지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갑니다.

 

헤로데의 잔인함은 백성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한 아기에게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를 더 잔인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헤로데는 악행과 폭력의 탈을 뒤집어쓴 듯합니다. 그의 마음에 고통과 눈물, 외침과 불평을 불러일으키는 살인적인 분노가 끓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당화할 수 없는 참극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악행의 잔혹함은 아무 권력도 없고 오로지 믿음만 강한 요셉과 대조됩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오늘 복음은 과거에만 얽매이지 않고, 지금도 발생하는 믿기 어려운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백만 명의 아이들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고, 폭력과 납치, 착취와 억압의 대상입니다. 갈수록 무감각해지고 무뎌진 마음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의 잔인한 무관심 속에 아이들이 ‘새로운 죄 없는 순교자들’이 되어 목숨을 잃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과 대립, 이념과 갈등으로 순진한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잔인함은 온 세상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하는 말을 듣고 악행의 탈을 쓴 임금과 그 어리석은 종들의 살인적인 행위에서 요셉이 보여 준 행동처럼, 그리스도인들과 마음이 착한 이들은 잔인함에 맞서 분개하며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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