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묵상 ]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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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 오늘의 묵상 ]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9.12.29.)

by honephil 2019. 12. 28.

오늘의 복음 말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성가정 축일, 문제를 한가득 안고 있는 아기 예수님네 집 이야기를 듣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은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였네요. 마리아로 하여금 죽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요셉으로 하여금 스캔들의 당사자가 되게 하면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죠.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저는 정말 태어날 때부터 순산했답니다. 쌍둥이 형이 난산이었더라고요. 태어나서 울지를 않고 숨을 잘 못 쉬더래요. 그래서 아기 살리려고 다 붙어서 조치한 끝에 간신히 그제야 울더랍니다. 그리고 딱 돌아보았더니만 그동안 제가 소리 소문 없이 태어나있더랍니다. 정말 태어날 때부터 효자중의 상효자, 현대판 심청이랄까. ^^


자랄 때도 그랬어요. 제 자랑 같지만 뭐 사실이니 말하자면, 부모님 속 썩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이건 물론 다른 이의 증언을 들어야 하지만.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사춘기도 가볍게 패스,  공부 잘해 착하고 친절해, 청소 엄청 열심히 해-그렇게 좋은 남편감, 사랑스러운 사윗감인데 결과는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혼자 삽니다. 가정이 없습니다. 나 혼자 산다!!

 

나 혼자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지만 우리 함께 사는 것은 더 만만치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사이에 겪어야 하는 수많은 갈등과 난관을 봅니다. 가족 부양하느라 힘들고 살림 사느라 티나 지도 않는 일에 시달리고 서로의 심기를 살피느라 고단하고 제 몫을 하느라 혹은 소홀해서 모두가 진이 빠집니다. 이해받고 싶은데 오해가 쌓여서, 사랑받고 싶은데 자꾸 미움이 튀어나와서 모두 힘들답니다. 힘들죠. 같이 사는 것은!

 


그런데요, 그리스도인 가정은 똑같이 힘들어도 좀 달라야 하죠. 오늘 콜로새서에서 성가정을 이루는 지침을 알려줍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자 이게 이천 년 전 사도 바오로가 하신 말씀입니다.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애들 못살게 구는 것은 동서고금 똑같은 것인가 봐요. 표독스러운 아내 어디나 있었나 봐요. 아내를 무시하고 모질게 하는 남편, 콜로새 교회에만 있는 것 아니죠. 자녀들이 반항하는 것은 타고난 것인가 봐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뭐 그리 새로운 이야기인가요. 아니죠. 이미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굳이 사도가 충고하신 것은 이렇게 해야 성가정 이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점을 다시 확인해줍니다. 우리 다 알고 있어요. 무슨 비법이 있는 것 아닙니다. 알고 있는 이 사실이 그런데 이스라엘에 율법에까지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 율법에는 부모를 공경, 배우자 사랑 있을 때 이 둘을 어떻게 하느냐. 한국 남자들 딜레마 빠지죠. 어머니냐, 아내냐. 그런데  ‘남자는 제 부모를 떠나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창세 2,24) 최우선시해야 하는 것 무엇이죠. 둘이 꾸민 가정!! 그것이 최우선이에요.

 

그래서 내 배우자와 부모가 충돌 생기면, 최소한 내가 배우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배우자와 논쟁하는 것은 피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부모 없는 자리에서 나중에 자기감정과 생각을 이야기하라는 것이 제 말이 율법이죠.

 

만일 부모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그런 액션을 취하면 자기 남편, 아내는 내가 사랑받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죠. 경솔한 행동이죠. 유다 율법에 심지어 배우자가 부모 모시는 사는 것을 원치 않으면 자기 부모도 모시고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까지 규정되어 있어요. 이거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 가르침 아니고 유다 율법이니까 각자 알아서 하세요. 무슨 이야기냐. 그만큼 배우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마마보이, 파파걸 돼서 무슨 일만 생기면 쪼르르 친가에, 친정에 달려가면 한 몸을 이룬 가정을 깨는 것이죠.


야곱의 아내는 무려 넷이었습니다. 그중 야곱은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장인 라반의 집에서 14년 머슴살이할 정도로요. 그런데 유일하게 라헬은 아기를 못 가집니다. 그래서 라헬이 투정 부리죠. 아이 갖게 해 달라고, 아니면 죽을 거라고! 그런데 야곱이 화를 내요. 물론 둘 사이에 갖고 싶지 않아서 안 가졌겠어요. 자기들도 노력했겠죠. 

 

그런데 야곱이 ‘이 여자야, 그게 내 탓이냐. 하느님이 허락 안 하시는데 어떡하겠냐’고 화를 냅니다. 이 말은 잔인합니다. 야곱 라헬도 서로 불임으로 심기 불편한데 라헬이 야곱에게 투정하는 것 결국 뭡니까? 뭔가 따듯하게 대해 달라는 것인데, 그가 화를 낸 이유에 상관없이 라헬에게 깊은 상실감 주었던 것입니다. 그냥 한번 안아주고 등 두들겼더라면 되었을 것을. 야곱은 정말 아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냉정한 남편입니다.

  
반면 사무엘 예언서 보면 한나도 아기 못 가졌고 늘 울면서 기도합니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그때 남편 엘카나는 그깟 자식이 뭐라고 어째 그러느냐고 먹지도 않고 그러냐고, 내 마음도 슬프다고,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느냐고-세심하게 한나를 다독입니다. 꾸짖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애정과 배려가 있는 말투로 최선을 다해 배우자에게 공감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죽는 날까지 같이 있을 사람 함께 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옆집 김여사, 박 여사 소용없습니다. 그저 당신뿐이고 내 식구뿐입니다.  가까이 있는 이에게 심한 말 하는 것 아니 된다면 내 식구에게, 내 동반자인 사람에게 더 많은 친절과 애정을 부어야 하는 것 - 이 당연한 일을 우리는 얼마나 소홀히 하나요. ‘신부님은 안 살아봐서 그런 말 한다’고 하지 마세요. 살아보지 않아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아, 자식 때문에 내가 살지, 당신 때문에 사는 줄 알아 -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개 아이들에게는 해달라는 대로 해주거든요. 아이가 소황제, 우리 집의 왕자, 공주님이시죠. 그런데 바로 그것이 아이 망치는 비결입니다. 잘되는 비결은 수없이 많지만 안 되는 비결은 단 하나,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염려 안 하셔도 망칩니다. 먹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 뭐든지 다 해줍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녀 앞에서 부부 싸움하시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이 잘못됩니다. 부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죠. 애 망치는 지름길은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아니라 아이가 지켜보는 부부관계에 있답니다.

 

호기 있는 그러나 간 큰 남자, 일차로 대학로에서 술 먹고 우리 집과 한잔 더하자. 포항에서 과메기 올라왔다고 손님들 끌고 밤에 쳐들어 옵니다. 그런데 율법에 얼마나 자세히 규정되어 있냐면, 손님들 데리고 오고 싶으면 물어보라는 규정까지 있습니다. 한 밤중에 손님 데리고 가도 되느냐 - 전화했더니만 ‘정신 차려, 이 인간아!’ 반응이 그러면 전화 끊고 ‘안녕히 가세요’하고 그 자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면 부인의 어깨에 짐 지어서는 아니 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손님 대접하는 노동은 다 아내가 하기 때문에 미리 동의를 구하라 세심하게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아내에게만 일을 위임하고 등쳐먹는 것 - 이것은 하느님께서도 가증하게 여기신답니다. 아브라함도 천사를 대접할 때 사라는 빵을 굽고 아브라함은 투플러스 송아지 잡고 젖 짜고 버터 만들고 똑같이 가사 노동했던 장면, 민주적 가사분담이에요.

 

성가정 이루려면 부부가 먼저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시작이고, 그래야 자녀들이 커서 부모 우습게 알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 손에 물 묻히는 것이 내가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이라도 하시면 좀 좋아요. 자녀들에게도 그러세요. ‘내 남자, 내 여자한테 함부로 하지 마.’ 그래야 아이들에게 그 사랑이 전달됩니다.


이집트로 피난 가는 예수님 가정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만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의 서로 간의 무한 사랑이 예수님 안에 깃들여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 사랑은 그렇게 번져가서 완성되어 가고 있을까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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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 13)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출세는 하느님 안에서의 실패와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세상적인 논리와 우리 그리스도인의 논리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적인 논리와 하느님의 뜻과의 상충에 대면하게 되면  단호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예’ 아니면 ‘아니오’의 선택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제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면 그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보기 나름일 것입니다. 일반인들과 같이 결혼해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삶은 어쩌면 사제들의 삶보다 더 어려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힘들고 덜 힘들다는 판단의 기준은 외적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 느야에 좌우될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참으로 성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결혼에 대한 유혹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저 행복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은 그렇게 심각하게 해 보지 않았습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사제들 역시 나름  행복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성모님을 바라봅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셨던 분이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보고서 판단한다면 그렇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성모님께서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지는 않으셨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성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제로서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 성모님의 삶의 이면에는 참으로 많은 아픔과 힘듬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을 어떻게 이겨나갔을까에 관심을 두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는 대가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그 아들을 죽게 하십니다. 바로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하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당신이 치르신 대가였습니다.


성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에 각자가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 놓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적인 유혹을 기쁘게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행복의 원천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내어놓은 사랑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사랑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이러한 행복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수한 죄 없는 아이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을 대면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능력함을 보지만 그러한 인간의 눈으로 본 하느님의 무능력 함이 바로 당신의 구원의 역사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확장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그 이유가 ‘하느님의 무능력함’에 기인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피신이었지만 이 피신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확장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하느님의 무능함이 우리의 구원의 계획의 실현에 있음을 명심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실천하는 거룩한 주간 지내시도록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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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각자의 가정을 기억하면서 우리 가정 공동체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가정의 가장인 요셉이 천사로부터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는 전갈을 듣고 성모님,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을 했고, 헤로데가 죽자, 다시 꿈에 주님의 천사로부터 이스라엘 갈릴레아 나자렛으로 돌아갔다고 전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정이 헤로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그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말씀과 성령이 그 가정을 이끌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이끄심 속에 살아갈 때 우리는 그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과 성령을 통해 참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세상의 유혹에 귀 기울이게 될 때 오늘 복음의 헤로데처럼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위협하는 마귀들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성가정은 일평생을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살아갔던 가정이었습니다. 그 아버지,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앙이 그대로 예수님께 이어지면서 온 가족이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구원의 삶을 이루어 갔었던 것입니다.  

제 기억 속에 돌아가신 제 아버지는 한 평생을 평신도 사도로서 끊임없이 기도하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신부가 가끔씩 빼먹는 성무일도도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시면서, 매일 성경말씀을 읽으셨고, 쉬시지 않고 사목회, 예비자 교리, 꾸르실료 등 많은 봉사활동을 하셨습니다. 암으로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호스피스 병실에서 아버지는 조과 만과와 성무일도를 아들과 함께 바치셨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하시길 아버지가 사제가 되셨어야 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렇다면 저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저의 어머니도 사제인 큰 아들과 정신지체 장애인인 작은 아들을 낳고 키우시면서 언제나 기도하시고 헌신하셨고, 성가대와 꾸르실료 등 여러 가지 많은 봉사를 하시면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가정 중에 시련과 고통이 없는 가정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가정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고통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자면 예수, 마리아와 요셉의 성가정 역시도 구세주 탄생의 과정 안에서도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아버지 요셉 성인은 헤로데의 위협을 피해 가족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을 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수난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면서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으며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그야말로 진정한 성가정의 모습을 함께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언제나 그렇게 항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구원의 길로 나아갔기에 교회는 그 주님의 가정을 가장 완전한 성가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을 지내며 오늘 미사 중에 올 한 해 동안 당신의 사랑 안에서 저희 가정과 공동체를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심에 감사드리며, 다가오는 새해에도 우리가 주님의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아 참된 구원의 시간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도와주시길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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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의 행복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가정의 일원들에게 헌신과 애정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행복은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줄 때 충만해집니다. 모든 이의 공동선을 위한 헌신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기와 그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고자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동방 박사들에게서 메시아의 탄생 이야기를 들은 헤로데 임금은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위험이 닥쳐오자 주님께서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은 일어나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서둘러 피신합니다. 부리나케 떠나면서 그동안 공들여 쌓은 성과와 집과 친구들을 모두 버립니다. 그의 행복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의 아들이 다스리는 유다로 들어가지 않고 갈릴래아의 작은 고을, 나자렛으로 갑니다. 요셉의 태도는 하느님의 부성에 대한 반영과 동참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와 그 어머니를 참으로 걱정하시고 천사를 보내시어 요셉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십니다. 요셉의 배려는 하느님의 배려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에게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나오고 요셉의 가정은 그분의 인도를 받습니다.

 

가정에서 애정이 이기적으로 변하면 나쁜 감정과 관계 때문에 불목이 가정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요셉이 아기와 그 어머니와 함께하였던 것처럼, 가장 힘없는 이들, 가장 작은 이들, 가장 소홀히 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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