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상 ] 로마에서 파리까지 수도원 순례 - 건축가 승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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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

[ 묵상 ] 로마에서 파리까지 수도원 순례 - 건축가 승효상

by honephil 2019. 12. 23.

최근에 건축가 승효상 작가가 쓴 '묵상'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그동안 내가 책보다는 전자기기에서 보이는 텍스트에 너무 함몰되어 사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 걱정해준 덕인지 지인으로부터 이 책을 소개받았고, 혹시 읽을 의향이 있다면 빌려주시겠다 하셔서, 정말 우연찮게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그분 말씀이 이전에는 좋은 책이 있으면 그거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곤 했는데, 어느 날 깨달을게, 책을 읽으면 좋을 거 같은 사람에게 선물하는 거보다는 오히려 이 책을 읽을 거 같아 보이는 사람에게 권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막상 책을 선물을 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읽었나 안 읽었나 관심이 가게 되고, 그래도 읽었다고라고 얘기해주면 고마운데, 전혀 읽은 내색을 하지 않거나, 아예 그 책을 선물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경우는 정말 괜한 짓 했나 싶기도 하고 한다 하신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그렇게 괜찮은 책이 있으면 그 책을 읽을 만한 사람에게 일단 얘기를 해보고, 읽겠다고 하면 선물을 하거나 빌려준다고 하신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간택(!)된 것이다. 

 

이 책 얘기가 나온 것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였다. 우리는 동해안으로 함께 여럿이 여행을 갔는데, 갈 때는 함께한 일행 중에 혼자 주제를 독점하는 분이 있어 주로 그분이 이끄는 주제로 얘기가 진행됐는데,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강원도 고성에서 보내고 다음날 귀경길에는 나와 그분이 함께 앉게 되었는데, 이때 이 분이 자기가 읽은 책 얘기를 꺼내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감명 깊게 읽었던 책중의 하나가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라는 작품이라고 하셨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전체가 잘 이해가 안 돼, 다시 읽었고,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돼서 또다시 읽었는데, 그렇게 세 번째쯤 읽으면서 그 책에 푹 빠지게 되셨다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책을 읽다가 울컥해서 눈물이 핑 돈 부분도 있다며, 경험담을 얘기하셨다. 

 

"아 저도 그 책 읽기는 했어요. 그런데, 좀 오래되어서 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하고 얘기를 이어가며, 이전에 우리 집에 분명히 그 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나, 집에 돌아오면 다시 찾아봐야지 하고 혼자 생각을 했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 책을 찾아봤지만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몇 년 전 집안 정리를 하면서, 오래된 책들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마도 휩쓸려 버려진 듯했다. 그렇게 생각이 드니 좀 마음이 찔렸다. 그 책이 있었다면 다시 한번 읽어볼 텐데, 좀 아쉬웠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그분이 이 책을 소개해주셨다. 그분도 건축을 전공하셨는데, 우연히 이 책을 쓴 승효상 건축가와 오랜 전에 친분을 갖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 책을 읽을 의향이 있으면, 줄 수는 없고, 빌려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큰 망설임 없이 좋다고 대답을 했고, 그렇게 해서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막상 받아 드니 책이 꽤 묵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총 500여 쪽이 넘는 역작이었다. 여행을 함께 하는 참가자들을 위한 꼼꼼한 준비서로부터 시작되는데, 우선 이 부분에 나에게 무척 새롭게 다가온 점이, 보통 여행 준비하면, 먹을 거, 입을 거, 잘 곳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영성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안내문에서 특히 나의 눈길이 머문 곳은 추천 다큐멘터리 영화로 나온 필립 그로닝 감독 <위대한 침묵>이었다. 보통 책에서 언급되거나 소재로 사용되는 영화는 메모해두었다가 시간 날 때면 IPTV에서 검색해서 보는데, 이번에도 올레 TV에서 검색을 해 보니 이 작품이 다행히 있었다. 그래서 보게 되었는데, 봉쇄 수도원인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Le Grande Chartreuse)의 일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리얼하게 보여주려 한 감독의 노력이 묻어나 있는 작품이었다. 하루 종일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오로지 묵상과 기도로 하루를 보내는 수도사들의 생활을 정말로 리얼하게 보여주는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최근에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도 연말 특집으로 방송되고 있는데, 그건 바로 KBS 1 TV에서 우리나라 상주 산곡산 자락에 위치한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3부작이다. 그 첫 방송이 지난 12월 19일 목요일에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첫 부분 약 30분 정도는 다른 일정으로 못 봤고, 그 이후부터 볼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수도원이 있었다는 사실에 우선 좀 놀랐고, 이렇게 속세를 떠나, 기도로 한평생을 묵묵히 이어가는 수도사들의 삶이 다시 한번 인상 깊게 느껴졌다.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이 있는 곳은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고, 그것도 두 곳이나 있다고 하는데, 한 곳은 상주에 다른 한 곳 충북 보은에 있다고 한다. 상주는 남자 수도원이고 보은에 있는 것은 여자 수도원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총 14일간의 빡빡한 일정으로 짜여진 여정의 흔적들이 나온다. 이를 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일 한국에서 출발해서 로마 입성.

제2일 베네딕토가 최초로 수도원을 만든 수비아코와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

제3일 로마

제4일 로마 국립 현대미술관, 산 카리스토 카타콤베, 산 빈첸초 수도원

제5일 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시에나 대성당, 산 지미냐노

제6일 산 지미냐노, 체르토사 델 갈루초, 피렌체, 도나텔로의 마리아

제7일 루카 산 조반니 바티스타 교회, 산 미켈레 성당, 산 마르티노 성당, 제노바 산 펠레그리노 산투아리오 수도원 

제8일 제노바, 로크브륀 카프 마르탱, 생 폴 드 방스 생 폴 주교좌성당, 카바농, 빌뇌브 루베

제9일 르 토로네 수도원, 고르드 세낭크 수도원, 생 레미 드 프로방스 샤토 루쌍

제10일 아비뇽 교황청, 생 베네제 다리, 그르노블 고르드

제11일 생 피에르 드 사르트뢰즈 리옹 에브

제12일 클뤼니 아르케스낭 왕립 제염소, 벨포르, 퀼뤼니 수도원

제13일 롱샹 - 샤펠 노트르담 뒤 오드 롱샹,  베즐레 성 마들렌 성당, 퐁트네 성당

제14일 바르비종 파리 퐁피두 센터, 추방당한 순교자 기념관

 

지금까지 대략 1/3 정도를 읽었는데, 베네딕토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에 걸린 ORA ET LABORA (찬양하고 노동하라)라는 현판이 기억에 남는다.

 

가급적 하루에 많은 분량을 읽지는 않고, 천천히 정말 책의 제목처럼 나만의 묵상을 해가며 읽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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