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마태오 9,9-13)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2023.7.7.)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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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해도 아무 응답도 없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태오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말하며 비판하는 이들이 있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희생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희생 제물이 왜 자신을 자비롭게 하지 못하는지 묵상해 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자비롭지 못하여 수백 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와 같은 학살자가 또 하나 있습니다.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이었던 스탈린입니다. 스탈린 정권은 강력한 권력 강화, 숙청, 강제 노동, 기근, 대량 학살로 특징지어졌으며, 지금은 통틀어 대숙청 또는 대공포로 알려져 있습니다. 분명 그가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이 되게 된 데에는 가정사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가족은 가난했고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아들과 아내를 구타하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반면 스탈린의 어머니는 스탈린의 초기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우 종교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스탈린이 신부가 되기를 바라며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스탈린은 신학교가 자신과 맞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은 아버지처럼 과격하였고 정치적 전복을 꿈꿨습니다. 결국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관련된 책을 읽게 되고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게 됩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의 투사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아이는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해서 신에게 ‘의탁’하는 삶은 맞지 않습니다. 결국 정권을 잡게 되면서 마음에 안 드는 수백 만의 사람들을 처형합니다. 만약 그가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었다면 러시아의 역사는 어땠을까요?
스탈린의 죽음은 매우 쓸쓸하였습니다. 뇌출혈로 하루 종일 밖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동료들은 그의 방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대처가 늦어졌고 어쩌면 일부러 대처를 늦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치료도 지연된 채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4일 뒤 사망하였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 동물보다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신학교는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봉헌하면서도 자신을 너무 믿으면 자기를 봉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잔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뱀의 본성은 본래 잔인한데 뱀을 죽여줄 피를 받지 못한 사람은 뱀을 봉헌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커다란 믿음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수도회에 들어와서 종신 서원을 앞두고 공황 장애까지 올 정도로 몸이 심하게 안 좋아져서 서원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도록 내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분은 한없이 분노하여 집에 가서도 부르짖으며 빨리 건강해져서 서원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날 즈음 기도가 들어질 것 같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보통 수도회에서 건강이 안 좋으면 3년 정도 유예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절망과 분노가 컸지만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주님 뜻대로 하세요. 수도자가 되든 말든 주님 뜻대로 하세요. 저는 그저 주님께 저 자신을 맡깁니다.”
그러자 기적처럼 2달 만에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어 수도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기도를 하기 전까지는 나를 주님께 봉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나에게 봉헌시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해 주시기를 바라며 봉헌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죽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가장 무자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사람의 뇌는 여러 작용을 하지만, 편도체와 전두엽은 그 하는 일이 정반대입니다. 편도체는 생존을 위해 이웃을 두려워하고 이용하게 만들고 전두엽은 이와 반대로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만듭니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불안과 두려움으로 정서 질환에 시달리게 되고 전두엽이 활성화되면 관계는 물론 몸도 건강해집니다.
전두엽은 특별히 내가 의탁할 누군가가 있을 때 활성화됩니다. 의탁할 대상, 곧 부모와 같은 나를 사랑해 주고 보호해 주는 대상이 옆에 있다고 믿지 못하면 저절로 편도체 활성화 인간이 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바뀔 수 없습니다. 편도체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두엽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다 그러하지만, 특별히 편도체를 안정화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파우스티나 성녀에게 알려주신 ‘자비의 기도’입니다. 자비의 기도 내용은 내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로 나 자신과 세상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내용을 각인시킵니다. 주님의 공로에 나는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주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곧 성령의 은혜에 나 자신을 의탁한다고 끝맺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마치 양 신부님이 기도한 것처럼 주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봉헌하게 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걱정이 사라집니다. 광야에 있지만, 걱정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됩니다. 광야에서는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의탁해야 합니다. 광야의 선 사람만이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의 기도를 바치십시오. 그러면 다 맡긴 광야의 인간이 됩니다. 광야의 인간만이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마태 9,12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ain, but the sick do. Mt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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