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오 22,34-40)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0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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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오 22,34-40)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021.8.20.)

by honephil 2021. 8. 20.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율법은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에서 시작됩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약속하시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충실하라.’고 율법을 내려 주십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율법 조항이 613개로 늘어나게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점점 법의 준수 여부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기본 정신은 잊고 법의 준수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하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유다인들은 날마다 두 번씩 ‘쉐마 기도문’을 낭송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그럼에도 이들은 왜 하느님을 잊었을까요?

 

이는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는 말씀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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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묵상을 못 하는 이유는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습니다.

율법은 613개뿐만 아니라 관습법까지 합치면 수만 가지가 넘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많은 율법 가운데 ‘정신’이 되는 율법이 두 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과 관련된 수많은 율법 조항이 생기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정신을 잃게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했습니다.

    

    현 시대는 이런 사탄의 계략이 바뀌었을까요? 똑같습니다. 워낙 잘 먹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그것이 소화되어 내 삶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아서 좋은 정보들이 소화되지 않도록 엄청나게 쏟아붓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만 수집할 뿐 그것의 정신을 뽑아내어 내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는 것처럼, 입력하고 이해하고 표출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시험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보만 입력하는 것을 공부라고 여기면 그 정보들은 결국 내가 생각 없이 살게 만드는 독이 됩니다.

    

    묵상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뇌의 앞부분을 이용하여 생각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마치 소가 풀을 뜯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해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요리하지 않아도 항상 남이 해 놓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실력을 쌓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묵상기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이미 정리된 정보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생각하는 노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생각 없는 인간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사탄의 도구입니다. 저는 현대의 ‘666’(그리스도의 적)이 ‘스마트폰’이라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은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이미 정리된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부어 사람이 전두엽을 사용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 전두엽을 퇴화시켜버립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자기가 눈으로 보는 정보는 곧바로 후두엽으로 갑니다. 머리 뒤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정보가 나의 것이 되어 행동으로 표출이 되려면 전두엽으로 와서 분해되고 소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늦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습득된 몸의 반응으로 바로 총을 쏘거나 총알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입력-숙고-표출’의 단계에서 ‘입력-표출’의 단계로 간소화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의 화면은 너무 빠릅니다. 그래서 한 화면의 내용을 깊이 숙고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다음 화면의 정보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화만 보고 산다면 머리가 텅 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 정보가 많아서 하나도 소화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신도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구를 할 때나 테니스를 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공을 끝까지 봐!”입니다. 보는 것이 어떻게 그 복잡한 동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보지 않으면 헛스윙을 하거나 빗맞습니다. 지금까지 연습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말은 “공을 끝까지 보자!”입니다.

 

    이처럼 그것에 통달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 따라올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말 하나를 찾아내고 오직 그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내 전두엽의 작용으로 묵상이 된 것을 단순하게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원래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게 되어있기에 동시에 주의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킬 수는 없습니다. 멀티태스킹을 한다는 말은 빠르게 주의를 여기에서 저기로 옮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것에도, 저것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뇌도 다른 것에 할당한 주의를 하나로 끌어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을 쓸 때, “하나, 둘, 셋!” 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에 힘을 줄 때까지 “하나, 둘!”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이것, 저것 분산해서 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탄이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들어 심지어 묵상도 하지 못하는 뇌로 만드는지 그 계략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에 주의력을 가장 분산하게 만드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사용하지 않고 옆에만 두어도 뇌가 힘들어합니다. 그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게 에너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기가 물지 않고 윙윙거리기만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일할 때는 다른 방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카톡에 답을 하는 것도 시간을 정해놓고 한꺼번에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각 없이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게임, 유튜브 동영상 등을 많이 보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 하는 그런 자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반면 책을 읽으면 한 주제에 오래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전두엽이 활성화되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생각 없이 인생을 허비하며 살게 만들기 위해 쓰는 가장 악랄한 방법이 정보의 홍수에 빠져 멀티태스킹 하며 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힘들지만 책을 읽으며 천천히 그 주제를 묵상하는 연습을 합시다. 나의 묵상이 단순한 가르침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원교구 꾸르실료의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꾸르실료는 본래 온전한 교리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던 당시 스페인 교회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안에는 교리를 가르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이미 남이 써 놓은 강의를 그대로 외워서 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에 강의를 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반응은 ‘우리가 어떻게?’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다들 잘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입력된 것만 그대로 반복하는 패턴이었다면 이제는 ‘묵상’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주제로 한 시간 이상 생각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체험과 연결될 수 있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 율법이나 교리가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수많은 정보의 공격들을 꼭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https://youtu.be/QQ1WJlfJZdg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오 22,34-40)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021.8.2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Mt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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