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오 20,1-16)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202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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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오 20,1-16)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2021.8.18.)

by honephil 2021. 8. 18.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한 시간 일한 일꾼과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된 맨 먼저 온 일꾼들이 자비한 포도밭 주인에게 투덜거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하늘 나라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포도밭 주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시며, 품삯은 하느님을 믿고 따른 신앙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투덜거리는 일꾼들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되고자 평생을 얼마나 조심하며 살았는데, 죽기 바로 전에 세례 받았다고 똑같이 천국에 간다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물로 받게 되는 ‘영원한 생명은 관계의 문제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생명이신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통해 살아 있는 이가 될 뿐 아니라,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114면 참조). 따라서 죽기 바로 전에 하느님의 이름만 알고 죽은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와, 한평생 하느님 안에서 울고 웃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루어진, 그분을 알고 그분을 닮고자 내어 주는 삶을 통하여 맛보게 되는 행복의 크기와, 마침내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나서서 그분과의 일치로 얻게 되는 영원한 행복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선물의 크기와 깊이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시간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복음을 전하는 일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고 행복일 수 있다면>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첫째가 되고 누가 꼴찌가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맡겨진 일을 즐겁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란 육체적으로는 고된 노동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 따르면 오후 5시에 와서 6시까지 한 시간 일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이 맡겨주신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일거리가 없어서 아침부터 5시까지 걱정만 하며 서성였던 그 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반면 꼴찌가 되는 사람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죽도록 고생한 이들입니다. 그만큼 일을 고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마음은 편했으니 몸은 좀 힘들어도 자신을 써 준 포도밭 주인에게 감사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꼴찌가 되는 사람은 ‘육체의 행복’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일꾼인데도 노는 게 더 행복해 보인 사람들이라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은 좀 힘들지만, 마음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아니면 마음은 좀 불편해도 몸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몸도 마음도 다 편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만 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하느님 나라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육체를 괴롭힐수록 성령께서 마음의 평화를 증가시켜 주십니다. 반면 육체를 편하게 두면 마음의 평화를 잃습니다.

 

    리오넬 메시가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습니다. 이적하자마자 그의 새 유니폼이 하루에 800억 원어치 팔렸다고 합니다. 많은 나이에도 아직도 건재한 그는 최대한 오래 운동장에서 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리오넬 메시보다 바르샤 1군에 더 빠르게 데뷔했고 메시보다 더 뛰어나리라 예측되었던 선수가 있습니다. 스

페인 출신 보얀 크르키치입니다.

 

    메시가 17세에 데뷔해 17세 10개월 만에 첫 골을 넣었다면 보얀은 메시의 기록을 더 단축합니다. 그가 첫 골을 넣은 것은 17세 53일이었습니다. 17세 때 31경기에 출전에 10골을 넣은 것은 17세에 데뷔한 라울 곤잘레스의 9골을 경신한 신기록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신력이었습니다. 메시보다 기록 면에서 앞섰던 그는 부담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매 경기가 메시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경기는 어느 정도 즐겨야 하는데, 그는 불안함에 발작 증세까지 일으켰고 승승장구하던 그의 행복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그 이후 그는 그저 평범한 선수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중입니다.

 

    도대체 ‘적어도 메시’라고 불리는 재능을 가지고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메시는 부담을 이겨냈고, 그는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골을 넣을 때마다 항상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 말은 자기 영광이 아닌 주님 영광을 위해 뛴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메시를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보얀은 자기 영광을 위해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자기 영광은 이기심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은 축구 경기장 같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자기를 고용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사람과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일하는 게 고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써주지 않는 자신을 써 준 주인에게 고마운 사람들은 온종일 일해도 한 시간밖에 일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서 살게 될 위치를 결정합니다.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1892∼1984)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하에서 목사들로 구성된 긴급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나치가 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도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8년 동안 감옥 속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다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을 받았습니다.

 

    이때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꾼 것이 아니고, 똑같은 꿈을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니묄러 목사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니묄러 목사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니묄러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목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아찔했습니다. 목사는 사실 지금까지 히틀러를 엄청나게 미워했습니다. 조직적으로 항거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까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똑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꾸던 날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했지,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또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했었느냐? 너는 어찌 그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너의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느냐? 왜 사랑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생각하지 못했느냐?”

 

    니묄러 목사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로서 그를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해 주지 못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못한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니묄러 목사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전쟁 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써서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인 나에게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독일은 물론이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로 있으면서 내 생각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히틀러에 저항했을 뿐 진정 하느님을 위해 히틀러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심판 때, 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편한 자리를 택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힘겨워했는가, 아니면 차라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삶보다 더 가치가 있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가로 심판받게 됩니다.

 

    포도밭 밖에서 놀고 있는 것보다 비록 힘은 들지만, 복음 전파의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여길 때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래서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시간이 항상 부족해야 합니다. 그 일터로 불러주신 분께 충분히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닌 주인에게 보답하기 위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높이 올라갑니다. 이것이 어디에서건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https://youtu.be/RmPy8-aISaA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오 20,1-16)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2021.8.18.)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마태 20.7

 

You too

go into

my vineyard.

Mt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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