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마태오 22,1-14) -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20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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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마태오 22,1-14) -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2021.8.19.)

by honephil 2021. 8. 19.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십여 년 전 위령의 날 미사에 참례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인사를 더 잘하고 싶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거울 보고 웃는 연습도 하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반갑게 신자들을 만날 생각을 하며 식당 쪽으로 갔는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복잡해서인지 막상 인사를 건네는 분이 없었습니다. 어깨를 부딪혀도 가벼운 눈인사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길을 내려와 마당에 이르니 저쪽에서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밥을 퍼 주고 있던 몇몇 신자가 국자를 내팽개치고 달려와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제 딸이 시집을 갔어요.” “신부님, 남편이 냉담 중이에요.” 하며 제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러고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다시 국밥을 퍼 주러 뛰어갑니다. 그분들은 첫 본당 신부 시절에 만난 신자들이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어깨를 스친 신자들은 고개만 끄덕하고, 국밥을 퍼 주던 신자들은 멀리까지 달려와 인사를 하는가?’ 그러다가 ‘아, 사람과 사람이 맺은 인격적 관계의 깊이 때문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신부라도 서로 인격적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으면 데면데면하지만, 아픔과 기쁨을 함께한 사람을, 그런 신부를 만나면 그리 반가운 것이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혼인 예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힘들 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뒤 그분에게서 힘과 지혜와 용기를 얻어 하나하나 극복해 나갔던 일. 내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닮고자 나 또한 내 것을 내어 주고, 그래서 그 사랑이 되고자 한 노력들 ……. 그러한 노고의 땀방울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하느님과의 친교의 깊이가 바로 우리가 마련해야 할 혼인 예복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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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하느님임을 모를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많은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임금의 사랑을 거부한 것에는 ‘사랑’을 자기 마음대로 정의한 원인이 큽니다. 자기 기준으로 임금의 사랑을 정의한 것입니다.

 

    초대에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이 그들을 사랑하여 초대하였지만, 그는 자기가 와 줘야 잔치가 잔치다워지니 임금이 자기가 필요해서 초대했다고 믿었습니다. 이 사람도 임금의 순수한 사랑을 자신의 변질된 사랑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순수한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우리 자아에서 나오는 독, 곧 세속-육신-마귀의 욕구 때문에 변질됩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기준으로 사랑을 정의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 결국은 다 자기 행복을 위한 거야!”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도 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를 초대하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해줌이 하느님께 이용당해 준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규정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내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와 선함, 그리고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규정할 때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만든 수준의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초대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순수한 사랑이 우리의 변질된 사랑을 심판하고 규정할 수 있지, 우리의 변질된 사랑이 그분의 순수한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쉰 포도주만 먹은 사람이 어떻게 값진 포도주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조금씩 덜 쉰 포도주를 마시며 참 포도주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초대에 온전하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무척 가난한 사람이 소금장수를 해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는 벚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하도 오랫동안 쓰다 보니 무슨 나무인지 모를 정도로 반들반들 닳았습니다.

 

    하루는 무거운 소금 짐을 짊어지고 지팡이에 의지해 산을 오르다가 중턱에서 휴식도 취할 겸 주먹밥을 먹는데 그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얼까 살펴보니 무덤 주변에서 하얀 여우가 웬 해골을 닥닥 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그걸 뒤집어쓰는 순간 할머니로 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상하게 여긴 소금장수는 지팡이를 들고 몰래 여우 뒤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여우가 큰 마을의 혼인 잔치가 열린 집으로 들어가자 소금장수도 밥을 빌어먹을 핑계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얼마 뒤 가마를 타고 도착한 신부가 안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안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소금 장수가 안을 들여다보니 할머니가 신부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작대기로 할머니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말리는데도 소금장수는 계속해서 할머니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쓰러져 죽으면서 꼬리가 희끗희끗한 여우로 변했습니다. 여우가 죽고 신부가 살아나자 사람들은 소금장수를 칭찬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은 어떻게 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았소?”

 

그러자 소금장수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다 몇 대째 내려온 이 지팡이 덕분이지요.”

 

그러자 동네에서 크게 농사를 짓는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지팡이를 내게 파시오.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소.”

 

    소금장수는 이것으로 먹고산다며 안 팔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물러서지 않고 큰돈을 쥐여주며 뺏다시피 소금 장수에게 지팡이를 샀습니다.

 

    부자 농부는 지팡이를 써먹을 길을 찾는데 마침 어디서 혼인 잔치를 한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그 집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방에서 신부가 배 아프다고 야단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가 병을 볼 줄 안다면서 들어가 보니 신부 옆에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부자 농부는 “이놈의 여우 죽어봐라!” 하면서 할머니를 마구 쳤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죽었는데 보니까 여우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생사람을 잡은 부자 농부는 한순간에 홀랑 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옛이야기로부터 배우는 성공법칙’,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실 ‘지팡이’가 없었다면 소금장수는 그 산 위까지 오를 수 없었고 해골을 뒤집어쓰는 여우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금장수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지팡이 때문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는 소금장수가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역사와 존재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농부는 단지 지팡이를 자기 관점에서 규정하여 자신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소금장수까지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용하실 때야만 온전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규정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수준 안에서 그것을 휘두르기 때문에 결국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 사랑도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 초대에 응하지도 않고 응했더라도 그분에게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습니까? 아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다 그 근본 에너지는 자신들이 규정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규정할 수 없기에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면 된다는 식의 교만이 세상을 망치는 것입니다. 일단 규정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순수한 사랑이나 진리, 선함이라 여기고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나가는 처지에서 궁금해해야 합니다. 사랑이고 선함이고 진리이신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몸에서 빛이라도 나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물고기가 바다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선생님!’이라고 부른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를 먹을수록 나쁜 포도주는 맛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랑하시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사랑의 전문가가 되는 길입니다. 소금장수와 지팡이가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YzW7NP9JyHk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마태오 22,1-14) -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2021.8.19.)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마태 22.4

 

Come

to the feast.

Mt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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