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마태오 22,34-40)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20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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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마태오 22,34-40)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2021.8.21.)

by honephil 2021. 8. 21.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비오 10세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1954년에 시성되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양피지에 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탈출 13,1-16; 신명 6,4-9; 11,13-21)을 적어 양피지로 만든 작은 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구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민수 15,38-39 참조)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입법자인 모세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을 만났고, 백성이 그분의 뜻을 법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나는 ……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 그래서 내가 …… 내려왔다”(탈출 3,7-8).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내려오셨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장 바니에는 “하느님은 ‘파라클리토’라고 합니다”(『눈물샘』, 159면).

 

그리스 말인 ‘파라클리토’(Paracletos)는 ‘곁에’(para)와 ‘부르다’(kleo)가 합쳐진 단어로 일반적으로 보호자, 변호자로 번역되며 ‘곁으로 불려 온 이’, ‘부름에 응답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도움을 청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이에 응답하여 파라클리토 엄마가 되듯이, 우리도 다른 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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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 그리스도의 품성>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었습니다.

 

    대리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리자의 자질 중에서 행실이 가르침보다 더 중요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제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은 강론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일까요? 성품이 그리스도답지 않다면 가르침은 따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품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가르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서 신자들이 사제에게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강론 잘하는 신부, 기도 잘하는 신부, 겸손한 신부 중 어느 것이 1위였을까요? 1위는 겸손한 신부, 2위는 기도하는 신부, 3위는 강론 잘하는 신부였습니다. 가르침이 꼴찌이고 성품이 1위입니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우선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신학생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를 가장 바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제와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계신다면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러 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치에 서면 신자들이 강론 잘하는 사제를 더 좋아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교구 사제의 주보성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강론을 엄청나게 못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공부 자체를 못 한 분입니다. 라틴어 때문에 사제가 못 될 뻔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항상 일주일 전부터 주일미사 강론을 글로 써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미 써 놓은 강론 원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미사 시작할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론 시간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만 하고 앉았습니다. 더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람들은 이 강론을 최고의 강론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거의 냉담하던 시골 마을에 온 비안네 신부는 하루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품을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것을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하지만 인품이 바탕이 되지 않은 강론은 어떨까요? 아무리 멋진 강론이라도 신자들은 “신부님 말씀 잘하시네!” 정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나 스승으로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를 ‘대리’하는 것이 아닌 ‘대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인품을 먼저 닮으려 하지 않으면 그것은 대리자가 아니라 모세를 대치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모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고 나옵니다.

    

    미국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시작 30분 전에 아주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한 거지가 나타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세 명만이 그 사람에게 간단하게 인사했을 뿐 어느 사람도 그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은 앞에 앉을 수 없다면서 맨 뒷좌석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교회 장로님이 나와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목사님은 예레미야 스피크입니다. 나오셔서 설교해주시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일제히 일어나 새로 오신 목사님을 환영하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강대상에 없었습니다. 맨 뒤에서 냄새를 풍기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돈을 달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웅성거렸습니다.

 

    예레미야 목사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용은 마태오복음 25장 34~40절 말씀이었습니다. 심판 때에 주님 오른쪽에 서게 될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모임을 보았지만, 하느님 자녀가 모인 교회는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라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면 가르침도 변질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처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이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품 중 닮아야 하는 것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이 안에 가난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인품입니다. 이것이 먼저 드러나지 못하는 강론이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주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에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거짓 모세의 대리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그분을 보여주고 그런 다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 순간에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은 유창한 말이 아닌 그분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https://youtu.be/Hy8e1KWDNTU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마태오 22,34-40)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2021.8.21.)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

 

The greates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Mt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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