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19,13-15)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202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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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19,13-15)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2021.8.14.)

by honephil 2021. 8. 14.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1941년 7월 어느 날, 아우슈비츠 수용소 14호 막사에서 수감자 한 사람이 탈출하였습니다. 그를 잡아들이는 것에 실패한 나치는 연대 책임을 물으며, 탈출에 대한 경고로 다른 열 명의 수감자를 굶겨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죽을 운명에 놓인 열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프란치세크는 아내와 자녀들을 떠올리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나의 부모, 아내, 자식을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 그 자리에 있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모자를 벗고 조용히 앞으로 나서 지휘관에게 말합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저 사람을 대신하여 제가 죽게 해 주십시오.” 죄수 번호 16670번이었던 콜베 신부는 보름 넘게 굶주림의 큰 고통을 겪은 뒤, 8월 14일 독극물 주사를 맞고 순교합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는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그가 온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 오던 신앙 여정의 최종 열매입니다. 성인의 가장 큰 가르침은 ‘모든 신자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길은 몇몇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모님의 ‘거룩한 순명’은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명은 또한 하느님을 닮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하신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움직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순명은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의 부름에 응답하듯이, 콜베 신부가 다른 수감자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였듯이, 우리도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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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자의 살리는 사랑, 진화론자의 죽이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가족입니다. 하느님 가족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어린이들은 사랑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왜 어른은 사랑할 수 없고 어린이는 사랑할 줄 알까요? 형제간의 우애는 어린이가 좋을까요, 어른이 좋을까요? 당연히 어린이가 좋습니다.

 

    하수구가 있어 자신보다 더 어린 여동생이 건널 수 없게 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준 동영상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진정 순수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니면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같은 부모님에게서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면 형제에 대한 사랑도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그 ‘나’는 뱀과 같은 이기적인 본성입니다. 어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내가 사랑하려 하면 그 나 때문에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나를 만들어주신 분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이것을 압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은 “엄마, 나 어디서 나왔어?”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본성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창조되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부모로부터 창조된 형제를 부모를 사랑하듯 사랑하겠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춘기 전까지만 영향을 줍니다. 그 이후에 부모가 나의 창조자가 아님을 알게 되면 부모뿐만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줄어듭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관심을 끄게 만들어 결국엔 사랑을 해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세상에도 큰 해악을 끼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기적인 ‘나’가 죽고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부모와 형제를 위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회는 거짓 사랑으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세상이 됩니다.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 온난화 대책으로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뿌린 냉각제가 온 세상을 얼려버리는 지구 멸망을 초래했다는 배경에서 시작합니다.

 

    열차의 앞칸으로 갈수록 돈과 권력과 쾌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뒤 칸은 그들을 증오하지만,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단백질 덩어리로 박해당하며 살아가는 하층민들이 있습니다.

 

    꼬리 칸의 지도자인 커티스는 반란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앞쪽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남궁민수란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빙하기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커티스는 맨 앞칸까지 가서 기차를 만든 윌포드를 만납니다. 그는 어린이들을 엔진 부속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윌포드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이어가라고 제안받습니다.

 

    그러나 커티스는 낮은 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낮은 자들을 계속 부품으로 이용하며 사는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쪽 팔을 잃어가면서 부속품으로 있는 아이를 꺼내 냅니다. 그리고 남궁민수에게 기차 문을 열라고 마지막 남은 성냥 하나를 건네줍니다. 그것이 있어야 크로놀을 폭파해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아이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며 두 남녀 아이들만 살아남고 모두 죽게 됩니다. 두 아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빙하기가 끝난 세상의 새로운 인류가 됩니다.

 

    커티스는 짓눌리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윌포드는 자신이 만든 기차 때문에 살아있는 이들을 약간은 부속품으로 여겨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사랑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죽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새로운 창조’를 희망했습니다. 기차로 상징되는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아담과 하와를 위한 창조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는 창조자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조자가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듯, 부모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었듯, 창조 때문에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까운 이들의 불합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커티스도 이 사랑에 동참하여 둘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팔도 잃고 생명도 희생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인 이유는 어린이들은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지 찾을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말은 부모의 창조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형은 동생을 위해 부모처럼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기심이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신 때문에 사랑한 것이기에 사랑을 잃으면 마치 전부를 잃은 것처럼 자기 삶도 포기합니다. 하지만 형제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죽은 형제의 몫까지 더 살아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은 바쳐도 남의 생명은 빼앗지 않습니다.

 

    자신의 원천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 창조자처럼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본성입니다. 어린이 중 진화론자는 없습니다. 다 부모가 필요합니다. 부모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본받습니다.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우리도 어린이처럼 되어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려면 이웃을 내 형제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이웃을 창조한 하느님을 부모로 여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다른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를 기뻐하실 수 없으십니다.

 

    창조자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때 이 세상은 생명이 충만한 하늘나라가 됩니다.

 https://youtu.be/gcwcOwa4YCg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19,13-15)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2021.8.14.)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

여호 24.23

 

Turn your hearts to 

the LORD.

Jos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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