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루카 1,57-66.80)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2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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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루카 1,57-66.80)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21.6.24.)

by honephil 2021. 6. 24.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세례자 요한이 탄생합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탄생합니다. 복음서에는 그의 탄생이 매우 놀라운 일로 묘사됩니다. 먼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그 이유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출산하였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뜻하기에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예고부터 시작됩니다. 탄생 예고 이후에 천사가 예고한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됩니다. 요한이 태어나고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기록되고서야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이 이야기를 화제로 삼습니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면 요한의 탄생이 놀라운 것은 그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탄생이 놀라운 마지막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의 탄생과 관련된 소문과 함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면서, 엘리사벳도, 즈카르야도 아닌 요한이 특별함의 이유가 됩니다. 복음사가는 그의 탄생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요한 자신임을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와 기적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특별한 인물,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는 더 큰 특별함과 놀라움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자신이 지닌 특별함에도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낮춘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도 요한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특별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고자 노력한다면, 세례자 요한을 닮아 가는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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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사춘기 겪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태어나고 할례를 받을 때 받은 이름입니다. 보통은 가족의 전통적인 이름을 따르지만, 완전히 새로운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지금으로 말하면 세례입니다. 따라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그 집안의 전통을 따름이 아닌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게 되는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된다는 뜻입니다.      

‘도시’가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광야’는 그런 것 없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에게서 왔고 또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 한다고 정해진 요한. 그는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저는 안 겪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사춘기를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안 겪은 것처럼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이도 키워보지 못한 저에게 많은 것을 물어옵니다. 물론 그들도 제가 어떻게 대답할지 뻔하게 알면서도 그저 답답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을 잘 이해하는지부터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의 성장이 빨라져 중2병이라 하지 않고 초4병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저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짜증이 나서 문이 부서지라 닫아버리고 자꾸 야동을 보고 게임에 중독되며 공부, 진로,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항상 우울해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버리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의 특징일까요?

 

    ‘이유 없는 반항?’ 이유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유를 모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유를 몰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뿐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10대, 사춘기가 지난 20대 대학생, 그리고 30대 직장인이 실험에 참여했습니다. 자동차 운전게임입니다. 결승전에 일찍 도착할수록 보상이 커지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노랑 신호등이 나옵니다. 노랑 신호등은 멈추어야 할지 빨리 지나가야 할지 애매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교통법상 노랑 신호등은 멈추라는 의미입니다. 노랑 신호등에 멈추면 3초가 더 걸리고 만약 무시하고 지나다가 사고가 나면 6초가 더 걸리게 해 놓았습니다.

 

    과연 이 게임에서 사춘기 아이들이 결승점에 더 빨리 들어가려고 신호등을 무시하였을까요? 결과는 예상 밖입니다. 노랑 신호등을 가장 잘 지킨 사람들은 10대 사춘기였고 그다음이 20대 대학생, 그리고 가장 지키지 않은 사람이 30대 직장인이었습니다. 통념과는 달리 사춘기 청소년들은 지킬 것은 지켜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아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이 제멋대로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실험에서 증명됩니다. 이번에는 각 또래가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게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10대가 노랑 신호등을 무시하는 경우가 20% 증가했습니다. 친구들이 지켜볼 때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무모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춘기 아이들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주위 관계에 따라 휘둘린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없다는 말일까요? 정체성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제라는 정체성이 명확하면 주위의 유혹이 있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이요, 엄마라는 정체성이 명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버클리, 하버드 대가 공동으로 벌인 한 실험에서 사춘기 아이들에게 어떤 소리를 30초간 들려주었더니, 아이들의 뇌가 멈춰버리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부정적인 영역은 활성화되고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긍정적인 영역은 축소해버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게 만드는 그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부모의 목소리’였습니다.

 

[참조: ‘청소년 사춘기, 반항의 이유’, 유튜브 채널, ‘EBSCulture’]

 

    사춘기 때 부모의 목소리는 극도로 싫어하지만, 자신이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지 몰라 친구에게 휘둘리고, 게임이나 야동, 혹은 자기 속에 파묻히는 등,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겪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사춘기는 부모의 자녀로서 부모의 말만 따르면 된다고 믿다가 이젠 부모가 자신의 원천이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가?’의 혼돈에 빠지는 시기입니다.

 

    이때 어차피 먹히지도 않는 부모의 충고는 아이들에게 반항심만 유발할 뿐입니다. 아이의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제 주님께 돌려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세례이고 유태인들처럼 정식적으로 첫 영성체 때 이뤄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모가 어떻게 아이들의 사춘기를 지나게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바로 ‘세례’를 주며 ‘새로운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는 뜻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마치 자신의 피조물처럼 놓아주지 않는다면 자녀는 언젠가는 사춘기를 크게 한 번 겪게 됩니다.

 

    부모에게 절대 순종만 하던 착한 딸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갑자기 아침에 걸을 수 없게되어 휠체어를 타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이름 모를 병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반항입니다. 혹은 결혼해서도 성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늦게서야 동성애자로 변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혼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춘기를 겪지 않으면 한 번은 이렇게 크게 겪게 됩니다. 모양새만 다를 뿐 정체성 혼란의 사춘기를 겪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다행히’ 저를 놓아주셨기에 저는 사춘기라는 것을 눈에 보이게는 겪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7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기에 7살 때부터 사춘기를 조금씩 겪었습니다.

 

    ‘그럼 나는 어디에서 왔고 나는 누구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TV에서 ‘슈퍼맨’이 나왔습니다.

 

    ‘그래, 나도 그럼 슈퍼맨처럼 외계에서 온 것이 확실해!’

그때는 하늘을 나는 슈퍼맨 꿈만 꾸었고 실제로 날아보려 하다가 배가 바닥에 갈려 까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날지 못하는 것은 슈퍼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방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성당에 처음 나가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슈퍼맨 놀이를 그만두었습니다. 나의 원천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는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는 분명 있습니다. 작게 겪느냐, 크게 겪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부모가 얼마나 빨리 아이의 이름, 곧 본성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자녀들에게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춘기를 겪었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는

 

그러면 빠르게 사춘기는 지나가겠지만 이 작업이 늦어지면 모두에게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에서 살게 해 주어야 합니다. 광야까지 인도해주지 않은 부모는 도시에 사는 아이의 고통을 함께 겪어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https://youtu.be/QnPN4zm0EZw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루카 1,57-66.80)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21.6.24.)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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