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5,17-19)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0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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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5,17-19)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021.6.9.)

by honephil 2021. 6. 9.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행보는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튀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상 거리를 두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리지 않으셨고(마태 8,1-4 참조),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2,1-14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목숨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율법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완성을 위한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참된 가르침과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떠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무엇인가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인상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의무를 강조하고 그것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율법주의적이라는 부정적 감정은 우리에게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무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이것을 죄라고 부르면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고해소에서 듣게 되는 죄의 양상은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에 죄는 단 두 가지, ‘주일을 지키지 못한 죄’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만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완성하고자 하셨던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일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만을 우리가 죄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주일’로 완성하신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율법을 부과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저 의무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마련해 주신 그분의 가르침이기 때문임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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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 어째서 폐지하러 오신 분처럼 보였을까요?


    율법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이는, 그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나 사랑을 강요하는 이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이는 세상에서 사랑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참사랑은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율법주의자로 남느냐로 결정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년 시절의 너’입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주인공 ‘첸니엔’은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소녀입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이 일류대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키기를 원하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작용이 심한 화장품을 팔고 다닙니다.
 

 

    그런데 첸니엔의 유일한 말벗이었던 한 친구가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합니다. 첸니엔은 자신의 옷으로 그녀를 덮어줍니다. 이로써 친구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다음 대상이 됩니다.


    이때 첸니엔의 어머니가 남의 돈을 떼먹고 도망을 하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래도 첸니엔은 꾹 참고 그들의 괴롭힘을 참아냅니다.
 

 

    그러다 돈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 일진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괴롭히다 정학을 맞습니다. 웨이 라이와 일진들이 복수하기 위해 첸니엔을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쫓기던 첸니엔은 쓰레기통에 숨어서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때 우연히 양아치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샤오 베이를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신고하는 걸 들켜 양아치들에게 끌려가 함께 괴롭힘을 당합니다. 

 

    샤오 베이는 자신에게 돈을 주면 첸니엔을 일진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말합니다. 웨이 라이 일당이 첸니엔에게 보복을 하려고 하자 첸니엔은 결국 샤오 베이를 찾아가 돈은 줄 수 없지만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샤오 베이는 지금 생활을 벗어나는 건 명문대 진학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듯한 첸니엔의 등하교를 같이 해주며 첸니엔을 지켜줍니다.

 

    항상 싸우고 다쳐 돌아오는 샤오 베이와 엄마에게 버림받은 첸니엔 둘은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점점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웨이 라이는 더 많은 패거리를 끌고 와 이전에 자살한 아이에게 한 것처럼 첸니엔을 짓밟고 머리카락도 강제로 자르고 옷을 벗겨 영상을 찍습니다.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경고해서 이들의 괴롬힘은 끝나지만 첸니엔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샤오 베이에게 돌아와 분노한 샤오 베이를 붙잡고 첸니엔은 서럽게 웁니다. 샤오 베이는 아이들에게 머리가 잘린 첸니엔의 머리를 밀어주고 자기 머리도 밀어버립니다.

 

    대입시험이 시작되고 여느 때처럼 샤오 베이는 멀리서 첸니엔을 지켜봅니다. 첸니엔이 시험을 보는 동안 공사장에서는 신원 불명의 시신이 발견되고,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는데 바로 첸니엔을 괴롭히던 웨이 라이입니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고 아이들이 찍었던 첸니엔의 동영상이 밝혀집니다.
첸니엔은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추궁당하지만, 심증 외에 물증이 없자 경찰은 첸니엔을 따라다닙니다.
 

 

    대입 시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샤오 베이가 모든 것을 자신이 뒤입어쓰겠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첸니엔을 스토킹을 했고 웨이 라이도 강간을 하려다가 실수로 죽인 거로 하자면서 소리 지르라고 시킵니다. 샤오 베이는 의도적으로 증거까지 남겨놨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이 한 일이니 자수를 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샤오 베이는 자기는 미성년자라서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거고 첸니엔이 대학 졸업을 할 때쯤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네가 이긴다면 나도 진 게 아니라며 어른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니 먼저 안전한 곳으로 가 있으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결국 첸니엔의 옷을 찢고 키스를 하다가 경찰에 체포됩니다. 자신이 한 범행처럼 증거를 만들어 놓은 샤오 베이는 경찰의 심문을 받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찾아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경찰에 신고하지만 말아 달라며 장난이었다면서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 너를 보고 싶지 않다면서 돌아섭니다.


    웨이 라이는 첸니엔을 따라가면서 첸니엔의 신경을 긁는 말을 하고 결국 참지 못한 첸니엔이 웨이 라이를 밀쳐내자 계단에서 구른 웨이 라이는 죽게 된 것입니다.
 

 

    형사는 첸니엔과 샤오 베이의 관계를 조사하다가 사실대로 말하면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샤오 베이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둘을 떠보기도 하고 압박도 하면서 진실을 털어놓도록 해보려고 하지만 둘은 서로를 모르는 사이라 잡아뗍니다.


    결국 둘을 대면시킨 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틋하게 바라보지만 진실은 감춥니다.

 

    그 후 첸니엔은 대입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북경대에 합격했습니다. 엄마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형사는 첸니엔을 찾아와 샤오 베이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첸니엔은 미성년자가 사형을 받은 것에 놀라 형사에게 미성년자가 아니냐 물으니 샤오 베이는 이미 성인이었다고 말해줍니다. 

 

    첸니엔은 샤오 베이의 면회를 하러 가고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첸니엔은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할 수 있겠냐 묻습니다.

 

    첸니엔은 사실대로 말하고 자수하여 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과실치사가 인정되었지만 웨이 라이와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상해 입은 것이 정상참작되어 4년 형에 처해집니다.

 

    시간이 흘러 첸니엔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주눅 들어있는 아이와 함께 걷습니다. 그 두 사람 뒤로 샤오 베이가 따라 걷습니다. 

 

    이 영화에서 첸니엔을 사랑하는 사람은 딱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샤오 베이입니다. 어머니는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와 같습니다. 첸니엔을 사랑하지만 그를 경쟁으로 내몹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을 사랑했지만 첸니엔이 사랑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사랑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반면 샤오 베이는 첸니엔이 자신을 위해 자수하여 감옥살이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샤오 베이는 동네 양아치였지만 첸니엔이 사랑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참사랑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더 가까운 인물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첸니엔의 어머니가 첸니엔을 더 사랑하고 양아치는 양아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각으로는 사랑의 율법을 완성한 인물은 샤오 베이입니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내가 의로워지려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까지 의로워지게 만듭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결론 부분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듭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유다 지도자들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https://youtu.be/1tPtTiSnZ9M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5,17-19)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021.6.9.)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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