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성경 전체에서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은 단 네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에 등장하고(마태 5,14), 나머지 세 번은 모두 요한 복음에서 등장합니다(요한 8,12; 9,5; 11,9). 두 복음서의 차이는 ‘누가 세상의 빛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9,5). 반면에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복음서 모두 틀리거나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빛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준 세상의 빛으로 지칭된 “너희”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마태오 복음은 앞서 빛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여기서 빛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너희”는 바로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빛으로 체험한 사람들로, 그들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빛으로 체험한 사람들, 그들이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짙게 물든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때로 빛보다 어둠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어둠이 눈에 익어 빛이 필요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바라보았던 사람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체험하였기에 이미 빛을 보았습니다. 나를 둘러싼 어둠에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미사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시고 그 빛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빛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둠에 있는 우리가 내 마음 깊은 곳의 어둠을 발견할 때, 더 밝고 환하게 빛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있고, 동시에 우리가 그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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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소금과 빛은 공기와 물, 혹은 양식처럼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물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은 내어놓아야 합니다. 소금이 녹지 않고 불이 타지 않으면 누구도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합니다. 배우자를 위해, 자녀를 위해, 이웃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그러나 왜 잘 안 될까요?
이것에 대한 통찰을 그린 영화가 있습니다. ‘삼사라’(The Samsara: 2001)입니다. 삼사라란 의미는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윤회의 세상이 삼사라인 것입니다.
해발 3500m에 위치하는 라닥의 어느 수도원의 동굴에 한 승려가 고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타쉬’입니다. 3년째 명상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머리는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오고 손톱과 발톱은 마음껏 자라서 마치 동물의 그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때 고행 기간이 끝나 감에 따라 그의 스승과 동료 승려가 동굴에 도착합니다. 오랜 명상을 끝낸 타쉬의 손과 발과 온몸은 거의 굳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정성껏 씻겨 주고 손톱과 발톱도 잘라주며 머리까지 깎아줍니다.
일행들이 그를 싣고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폐허가 된 사원을 지납니다. 그곳의 돌무더기에 쓰인 문구를 우연히 주인공은 보게 됩니다. 그 돌에는 티베트어로 다음과 같이 씌어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는 3년간 고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라마교 최고의 입문식에 참여하고 고위직까지 받게 됩니다. 그 행사날에 축제가 벌어지는 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젊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입니다. 생전 처음 그런 장면을 목격한 타쉬는 그 이후로 매사가 의욕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그의 도반 승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아마도 이후로 전개될 험난한 인생 여로가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화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원에서는 마을 축제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마을 축제에서 운명적인 여인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보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지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런 현상을 눈치 챈 그의 스승이 타쉬를 어느 묵언 정진 중인 고명한 승려에게 보냅니다. 그 승려는 동굴 속에서 정진하고 있었는데 타쉬가 오자마자 알아채고 그림을 내밉니다. 그림 속에는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약간 기울어 보면 해골로 변하는 신기한 그림입니다. 모든 애욕이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로 된 액자도 보여줍니다. 그 액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이 글을 보고 타쉬는 부리나케 되돌아와 그의 스승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부처님도 29세까지는 속세에서 사셨고, 깨우침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5세 때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같이 살아왔지만, 부처님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 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 후의 만족감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할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지요.”라고 말하면서 사원을 떠나게 됩니다. 환속하게 된 것입니다.
떠돌이로 나서면서 찾아간 곳이 전에 마을 축제할 때 눈이 마주쳤던 처녀의 집입니다. 추수할 때까지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처녀와 결혼하게 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일이라는 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곳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상 욕망에 물들어가는 타쉬는 수행자의 모습이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속세의 인물로 변하였습니다.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줄이자고 말하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여자 일꾼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범부보다 더 못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도반이었던 친구 승려가 방문하였습니다. 스승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됐구나. 우린 다시 꼭 만날 것이다. 우리가 재회하는 그날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 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겠지.”
스승의 편지를 받고 난 후 타쉬는 반성하게 됩니다.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왔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욕망을 죽이고자 그렇게 수행했던 것이 다 허사였다는 옛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욕망을 정복하기 위해 수행을 다시 하기로 합니다.
타쉬는 아내와 아이가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게 됩니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두고 떠나듯이 새벽에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걸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참 길을 걷던 중 어느 무너진 오래된 사원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야소다라 왕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 왕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당신이 불도를 사랑한 열정이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만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욕망을 이겨내지도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타쉬의 모습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타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염주가 든 단지를 남편에게 주고 가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쉬는 절규하게 됩니다. 땅을 뒹굴며 절규하다 잠이 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나자 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바로 그 돌이었습니다.
그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이 글을 보고 타쉬는 짙푸른 창공을 쳐다보게 됩니다. 창공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출처: ‘영화이야기-삼사라’, 다음 카페, ‘따밥사모’]
타쉬는 수행을 하여 욕망을 가라앉히면 열반에 이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죽이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내려가 참사랑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욕망이 살아있는 한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또 이웃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할 뿐임을 알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불교 교리의 한계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구도의 한계를 느끼고, 욕망을 죽이고 참 빛과 소금이 될 에너지원인 신의 존재에 우리 몸을 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나의 사랑이 마르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자신이 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망도 사라지고 마르지 않는 물을 내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복음은 진복팔단 바로 뒤에 나옵니다. 진복팔단은 먼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자신을 채워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박해도 받겠지만 가장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내가 주는 한 방울의 물은 금방 말라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욕망이 사라지고 참 만족을 느끼기 전에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내 물이 마르면 다른 물을 빨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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