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6.3.)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6.3.)

by honephil 2021. 6. 3.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이 포함되고, 그 밖에 우리에게 신앙인의 의무로 주어진 것들이 포함됩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나요? “예.”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 말씀은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정신 그리고 힘’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마음, 목숨, 정신과 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 자신의 온전한 몰입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한계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에게서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누군가를 최대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사랑이 아주 출중하지 못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나의 사랑은 그 상대의 사랑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을 길러준 늑대 부모를 완전히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늑대 부모의 사랑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가 사랑을 더 증가시키고 싶었다면 늑대가 아니라 인간 부모를 찾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또 똑같은 예화를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다른 예화를 찾을 수 없어 반복합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 후 토마스는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사랑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많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부모를 사랑해 봐야 그 수준밖에 안 됩니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역시 올바른 예화는 아니지만, 영화 ‘에비타’의 후안 페론의 삶을 보고 싶습니다. ‘에바 페론’, 에비타는 본래 작은 시골의 연극배우였습니다.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고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그 사랑의 한계는 그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비타는 도시로 상경해서 그곳에서 고위층 남자와 사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넘어서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고 그렇게 사귀는 사람을 높여가다 결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사귀게 됩니다.

 

    에비타는 영부인이 되어 이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시골 여인으로 살던 자신을 영부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크지만, 에비타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많은 사람에게서 거의 성녀처럼 추앙받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에비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돈 주고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머물렀다면 그녀의 사랑은 그 사람의 사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의도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녀는 더 높은 단계의 사랑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먼저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께 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자매님이 남편의 도박과 외도, 폭력에 못 이겨 이혼을 앞두고 메주고리에로 성지순례를 하러 갔습니다.

 

    밤낮없이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오르내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유산시키고 자신에게 몸과 마음의 커다란 상처를 준 남편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술과 도박을 끊고 묵주를 손에 쥐고 아내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스도는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그만큼이 곧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가 됩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분을 더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소명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길은 기도와 공부와 희생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위해 부모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랑을 묵상해야 하며 또 부모처럼 고생을 해 보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공부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희생으로 그분의 고통을 느껴본다면 결국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도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부모를, 친구를, 미운 사람까지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Hx0sBBOHvL8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6.3.)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