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2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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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21.6.2.)

by honephil 2021. 6. 2.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시작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그들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또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이 지닌 본질에는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출발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마르 12,18)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성경책에 기록된 죽은 하느님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었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아닌, 자신들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상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 같은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만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성경 속 등장 인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전례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지요? 기도할 때만 하느님을 찾지는 않았는지요? 하느님은 성경 속이나 전례 안에서만, 또는 기도할 때만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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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하면 보이는 대로 믿고 겸손하면 믿는 대로 보이는 것을 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을 다룹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고 부활이나 심판과 같은 내세의 교리들을 믿지는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부활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따지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만약 부활이 있다면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결혼해 살았다면 내세에서는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는 모세오경 중,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저기 죽어서 썩어가는 개의 주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체면이 설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존중하는 살아 있는 성조들의 주님이시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두가이들은 성경을 그렇게 협소하게 해석하고 자신들의 해석이 옳다고 믿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들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믿게 합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진리를 판별하는 주체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진리 자체이십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만 모든 것 안에서 진리를 분별해 내실 수 있으십니다.

 

    따라서 내가 진리를 판별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성경이 본인이 해석하는 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교만한 것입니다.

 

    요즘 손정민 군의 사건이 식을 줄 모르고 연일 주요 뉴스로 나오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분명히 생각은 있지만, 일단은 판단을 보류하기 위해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전 국민이 둘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며 저도 어떤 쪽엔가 서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대한 생각을 보류하려 합니다. 어차피 저의 생각이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텍사스에서 한 젊은 남자가 애인에게 총구를 겨눈 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구가 막혀 다행히 여자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판사는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결정했지만 나중에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평소에 모범생이었다는 근거로 4일 후에 보석금을 2만 5천 달러로 낮췄습니다. 낮춰진 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얼마 후 여자 친구를 살해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틀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를 만나고 온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그를 약속을 지킬 사람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습니다. 아무리 판사라도, 아무리 고위 정치인이라도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인도에서 한 아이를 알았습니다.그 아이가 다 좋은데 숫자 계산을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나 세 개를 하나씩 주며 “내가 너에게 바나나를 하나, 하나, 하나 주었어. 그러면 너는 바나나를 몇 개 가지고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네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며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숫자 세는 법을 다시 알려주고는 바나나 세 개를 다시 주고는 몇 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네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고집불통임을 깨닫고는 약간 화를 내며

 

“세 개 다 먹어라.”하고 바나나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울먹이며 바나나 세 개와 자기 주머니에 있는 바나나 하나를 꺼내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가진 바나나의 개수를 정확히 말한 것이지만 류시화 시인이 보이는 대로만 믿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보이면 믿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진리 판단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는 신이 앞에 나타나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이 진리 판단의 기준, 즉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이런 오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부활을 믿고 심판을 믿는다면 그들이 현실에서 비윤리적으로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부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그래서 부활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믿게 되니 부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성경들은 빼버리고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그 안에는 부활에 관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을 이미 확신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서도 부활의 증거를 찾아냅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신학을 할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것에서 무언가 찾아내려는 시도가 조금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석사를 할 때 교수와 대립하고는 성서신학 대신 먼저 교리를 더 잘 알자는 마음으로 과목을 바꾼 것입니다.

 

    그렇게 바꾸고 나니 자연적으로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로마 성서대학(비블리꿈)에서 조교를 하는 포르투갈 신부와 식사할 때였습니다. 그는

 

    제가 성경 말씀대로라면 이집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지금도 이집트 사람들을 나쁘게 보아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이집트 사람들을 좋게 보려고 한다면 성경에서 그 이후 이집트 사람들이 회개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이집트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느님께 죽임을 당해야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성경해석입니까?

 

    유다인들은 심판과 연옥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 예수님 탄생 이전 기원전 4세기까지의 모든 성경을 정경에서 빼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 당시 정경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옥 교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루터는 교회 전통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정해놓은 정경을 따르기로 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그들이 성경을 해석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 믿음과 반대되는 내용이 있는 것들을 빼버리고 성경을 축소한 행위입니다. 사두가이들이 한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에 대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을 모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능력에 대한 믿음은 빼놓고 성경해석으로만 하느님 능력을 규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 부활을 믿고 계셨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안다는 말은 그 성경이 우리가 보이는 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로 해석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해석하지 못하는 성경 구절이 매우 많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의 말씀으로 기적이 행해지는 것이나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셨다는 말 등은 해석이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라고 제자들을 파견하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는 장면도 그렇고, 진리의 기둥이 교회라고 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이 먼저 있어야 제대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이제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며 문자 안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 방법 자체가 이단이나 사이비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그런 종교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성경공부는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교리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곧 교리를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성경도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사두가이들이 아무리 모세오경을 외우다시피 해도 오늘 예수님의 해석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어야 보이고 믿는 대로 보이기에, 우리가 보이는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는 것은 곧 교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https://youtu.be/o6q5kd5HFy8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21.6.2.)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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