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르코 12,13-17)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20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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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르코 12,13-17)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2021.6.1.)

by honephil 2021. 6. 1.

유스티노 성인은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 토론을 하고 이를 토대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냈다.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도 한 성인은 165년 무렵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향한 부정의 감정을 드러내는 ‘올무’에서 시작하여 ‘감탄’이라는 긍정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주목할 점은, 올무가 감탄으로 바뀌는 그 자리에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모함을 마주하는 가운데, 어떤 화려한 언변이 아닌 하느님을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복음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해 줍니다.

 

첫째,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신앙의 의문들, 신앙과 삶의 질문들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닌 신앙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려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라는 올무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우리가 던지는 신앙의 의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안에서만 해결됨을 오늘 복음은 알려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대답처럼,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황제에게 세금은 바칠 줄 알면서,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릴 줄은 모릅니다. ‘성공’과 ‘부’(富)라는 이 시대의 황제에게 우리는 많은 세금을 바치면서 살아갑니다. 부귀영화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아까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반면에 하느님께 속한 것은 어떠한가요? 주님께 속한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하느님께 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우리에게 시편의 저자는 소리 높여 외칩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시편 24[23],1). 세상과 세상을 채우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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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결핍이 주는 선물 : 경탄과 감사의 삶>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 믿는 이에겐 돈도 하느님의 것이고 황제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과 황제는 하느님과 상반되는 무엇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것이지만 하느님은 당신께 합당한 것만 챙기십니다.

 

    ‘세금’은 무엇일까요? 나라의 보호, 나라의 복지와 모든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방법입니다. 만약 탈세하는 사람이 외국에 나간다고 여권을 달라면 나라에서 만들어줄까요? 주지 않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정부가 자신의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세금은 이렇듯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나라가 없으면 난민이 됩니다. 그러니 나라 덕분으로 버는 것의 일정 부분을 나라의 유지를 위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금은 내가 그 나라에 속해있고 나라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세금을 낼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듯이 하느님께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그 나라에서 바쳐야 했던 세금은 선악과였습니다. 세금을 바치지 않자 그 나라에 살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 나라가 아니면 우리는 살 곳이 없음을 고백하는 세금과 같습니다. 

 

     그런데 왜 탈세가 이어지고 주님께 십일조의 세금도 내지 못할까요? 문제는 자신이 받는 것이 당연한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 이야기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못된 소작인들은 세금도 내지 않기 위해 세금을 받으러 온 왕의 외아들을 죽입니다. 

 

    리지외의 아기예수의 성녀 소화데레사의 평전, 『빈손』에 타고르의 우화가 있습니다.


    ​한 거지가 왕중의 왕이 황금마차를 타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봅니다. 그는 무슨 큰 보화를 주겠거니 마차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임금은 내려서 오히려 거지에게 손을 내밉니다. 거지는 농담하는 줄 알고 자신이 주운 낟알 한 개를 왕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냥 떠나버립니다. 집에 돌아와 바랑을 쏟아보니 한 알이 황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애타게 울며 이렇게 통곡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임께 바칠 용기가 있었더라면!”

 

    거지는 자신이 사는 세계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만 가난하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 땅에 살며 낟알을 주워 먹게 한 것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거지는 요구만 합니다. 나라를 잃어봐야 나라의 소중함을 알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잃어봐야 십일조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잃어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절제를 통해 더 봉헌하게 되고, 더 봉헌하면 또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기 족 인디오는 안데스 산맥 북쪽 끝, 콜롬비아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 산 해발 5,900미터 높이에 살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을 피해 오랜 세월 동안 외부 세계와 접촉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독특한 전통이 있습니다.
 

     ‘마마’라고 불리는 코기 족 사제들은 신점을 쳐서 장차 사제가 될 운명을 지닌 존재가 태어날 시기를 알아냅니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산 위쪽의 동굴로 옮겨집니다. 젖먹이 때는 어머니가 동굴 옆에 머물면서 젖을 먹이고 보살피지만, 이후에 아이는 사제들에 의해 양육됩니다.
 

    사제에게 선택된 아이는 9년 동안 일절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해와 달조차 볼 수 없습니다. 낮에 자고 밤에 깨며 버섯, 호박, 콩 등 소박한 음식만 먹습니다. 사제들은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어머니’인 알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화와 종교의식을 아이에게 가르칩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아이는 인간의 마을로 내려갈지, 동굴에 남아 배움을 계속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후자를 택하면 다시 9년의 교육이 동굴에서 이어집니다.
 

    희미한 빛밖에 없는 동굴 안에서 아이는 자기 내면의 영성과 대화하는 법, 하늘과 땅의 비밀, 인간 세상의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나무와 산이 어떤 모습이고, 하늘을 나는 동물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바닷물이 몸에 닿을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어둠 속을 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마음이 지어내는 환상을 꿰뚫어 보는 투시력이 생겨납니다.
 

    마침내 18년의 혹독한 수련이 끝나는 날, 아이는 사제의 손에 이끌려 시에라 산맥의 새벽빛 속으로 나옵니다. 그때까지 관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 온 세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의 충격! 놀라움과 경이로움! 나뭇잎들의 초록색 수런거림, 바위에 자라는 이끼, 골짜기를 나는 새, 최초로 살에 와닿는 햇빛,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들! 경외감에 압도되어 아이는 무릎을 꿇고 위대한 어머니 알루나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이는 대지에 깃든 신성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게 되고 부족의 사제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부족 사람들에게 그 신성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이 세계와 영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우리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일깨우고 모든 것의 창조주께 당연한 감사의 표현을 하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된 사제들입니다. 사제들에게 감사가 없으면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더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바람과 나무와 꽃들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사제를 통해 감사의 제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제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인장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한 그룹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하고 한 그룹은 뒤쪽에 있는 학교 건물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건을 흘립니다. 어느 쪽이 더 물건을 흘리고 넘어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을까요? 당연히 대자연에 경탄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경탄할 수 있는 마음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이 경탄은 약간의 절제에서 옵니다.

 

    ​약간의 절제는 물에 대한 감사, 음식에 대한 감사, 가족에 대한 감사, 친구에 대한 감사 등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약해서 절제하지 않으면 더 많이 받지 않은 것에 불평하게 됩니다.

 

    경탄하기 위해 절제합시다. 그래야 선악과를 감사히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vlGgsmNqscI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마르코   12,13-17)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2021.6.1.)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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