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부활 시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다. 성령 강림으로 인류 구원의 사명이 완성되었고, 이러한 구원의 신비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교회와 함께 계속된다는 의미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이 완성되었음을 경축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여러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날을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탄생한 날로 본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입김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표시합니다(창세 2,7; 욥 33,4 참조). 또한 신약 성경에서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시고(마태 3,13-17 참조), 오늘 제1독서에서는 ‘불꽃 모양의 혀’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고(로마 5,5 참조),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하시며(로마 7,6 참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고(갈라 3,29 참조), 죄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시는 분(로마 8,10-11 참조)이십니다.
또한 한 세례를 통하여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에페 4,3-6 참조). 성령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숨을 쉬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보다 평화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에 서시며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곧 용서입니다.
스승을 버리고 떠난 죄책감 속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용서, 두려움에 서로를 의심하고 이웃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용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데 대한 용서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서로 용서한다면,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의 평화가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는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봅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덕을 완성하여 주님께 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 칠은은 지혜, 통찰, 식견, 용기, 지식, 공경 그리고 경외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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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을 준비 : “악에서 구하소서!”의 “악”은 무엇인가?>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는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돈을 벌러 나가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라는 어머니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아 자녀들을 먹이고 키웁니다.
자녀들은 이런 부모의 사랑으로 하늘 나라에서 살 자격을 갖춥니다. 그 자격이란 “죄를 용서해 주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나가서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성령 없이는 죄의 용서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고 싶은 사람은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목마른 사람만이 물을 청합니다.
우리는 목이 마른가요? 죄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그러면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것에 목이 더 마르면 성령에 목이 마르는 것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성령에 목이 마른 것인데 성령을 청하면서도 결국 성령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란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인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악’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이 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에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악에서 구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까?
10년 동안 미국에서 방영된 역대 가장 인기 있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왕좌의 게임’입니다. 지극히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 우리가 보아서 이익될 것은 없는 세속적인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큰 주인공은 ‘대너리스’란 여자와 ‘존 스노우’란 남자입니다.
7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합체에서 철의 왕좌에 앉겠다고 서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대너리스는 그 왕좌에 가장 정당한 혈통이지만 반란으로 쫓겨난 상태입니다. 존 스노우도 대너리스와 함께 왕좌에 정당한 혈통이지만 다른 가문에서 서자로 키워져서 핍박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왕좌에 가장 정당한 혈통의 증거는 용을 타고 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너리스는 점차 자신이 용의 어머니임을 깨달아갑니다. 오빠에게 핍박을 당하며 팔려가서 정략적으로 혼인하고 혼자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이지만 점차 자신이 그 철의 왕좌에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용의 알 3개를 지니고 있고 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위기 때마다 자신이 왕좌를 되찾으려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으로부터 용의 도움으로 이겨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노예들을 해방하여 백성의 사랑을 받는 여왕으로 성장해 갑니다.
하지만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세르세이’는 아무리 용이 있어도 혼자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어 대너리스는 북부지방을 점령한 존 스노우와 동맹을 맺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존 스노우가 용을 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사람들이 그를 더 좋아하고 있음에 질투합니다. 사실 그가 자신과 같은 혈통이면서 왕좌에 더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둘이 협력하여 세르세이를 몰아내고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러나 대너리스는 이미 용을 두 마리나 잃은 상태이고 백성들이 자신보다 존 스노우를 더 좋아하는 것에 분노하게 됩니다. 용은 분명히 자신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르세이를 따르고 또 존 스노우를 더 좋아하는 백성들을 용의 불로 쓸어버립니다.
존 스노우는 깨닫습니다. 대너리스는 결국 세르세이보다 더 무섭게 백성을 통치할 것임을. 그래서 자신도 왕비를 죽인 대가를 치러야 함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여인 대너리스를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추방당합니다.
10년에 걸쳐 시즌 8로 되어 있는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대너리스가 그 왕좌에 합당한 유일한 사람이라 믿게 만듭니다. 용을 부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용이 자신의 백성들을 몰살하는 분노로 변하게 되면서 대반전을 가져옵니다.
대너리스에게 도움은 존 스노우였습니다. 존 스노우는 그녀가 힘을 절제할 수 있도록 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너리스는 그보다는 자신의 용을 더 믿었습니다.
세 마리 용은 재물에 대한 욕심, 육체의 쾌락, 권력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존 로크를 만나며 그 힘이 줄어들 것을 걱정한 대너리스는 존 로크보다는 용의 힘을 믿고 용의 힘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녀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용을 잃기 싫어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용은 왕좌를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언정 백성들에게는 두려움밖에 주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존 로크는 성령님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의 힘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분노를 쏟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분노와 미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을 믿는 대너리스는 성령보다는 자기를 믿기로 합니다. 대너리스는 성령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에서의 “악”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믿을수록 세 마리 용의 힘은 더 커집니다. 성령께서 그 힘을 꺼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 혹은 아니오가 아니면 다 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자신을 태워서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가 일정 한계를 넘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고 육체의 즐거움을 찾으며 명예와 교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부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소를 얹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불이 떨어져 자아를 상징하는 소와 그것이 자아내는 욕구들을 다 불살라버립니다. 그러자 우상을 섬기게 만드는 예언자들도 다 죽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일 자유도 있고, 거부할 자유도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모든 이에게 성령을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자기를 죽이기를 원하는 이는 기도를 하겠고, 자기 힘으로 살려는 이는 기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수이고 용이고 뱀임을 알고 그 뱀을 밟으려는 힘을 청하는 이들에게만 이뤄집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할 때, 그 악이 자기 자신임을 항상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이 사탄의 악에 동의하지 않을 때 어떤 악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말하며, 그 자아를 죽이기 위해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은 우리 자아를 죽이러 오십니다. 예수님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 나를 박는 그 세 개의 못이 곧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이 무엇하러 내 안에 오시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면 언젠가는 나도 성령을 거부하게 되고 그러면 멸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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