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이 되라는 사명에 대한 확증’이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주님의 파견 사명으로 베드로는 교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하십니다(『나자렛 예수』 1권 참조).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제품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돌보시고자 “나의 양을 사랑하겠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점입니다. 사목의 대상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연결이 없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양을 돌보되 “삯꾼”(요한 10,12)에 지나지 않으며 “착한 목자”(요한 10,11)는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은 사목자뿐 아니라 교우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가 ‘주님을 믿으려고’라고 말하면서, 주님보다는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신자들을 보고 쉽게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다가도 뒤돌아 섰다가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듯이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주님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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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7명이 탄 제자들의 배가 153마리나 되는 물고기를 잡게 만드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 양 떼를 맡기시며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3번 고백하게 하십니다. 분명 3번의 사랑 고백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한 것의 죄책감을 씻어주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교회에 당신 자녀들을 맡기시는 방식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더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게 될 때, 예수님은 안심하고 그 목자들에게 당신 자녀들을 맡기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위해 당신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피로써 성직자들이 순결해지면 성직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분의 양 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자녀들을 맡아 키우는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를 위해 먼저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피에 남편 피도 반은 섞여 있기에 아내가 자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아내가 자녀를 위해 남편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남편도 자녀를 위해 아내가 자신을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영화 ‘바보’(2008)는 강풀 만화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등장인물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혼자 토스트 가게를 하며 고등학생 여동생 지인이를 돌보는 승룡이가 있습니다.
지인이는 바보인 오빠가 싫어서 학교에도 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바보 승룡이는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인 지인이를 잘 보살피라는 것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승룡이는 원래 바보였던 것은 아니고 연탄가스 누출로 아버지는 사망하고 자신은 그런 장애를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승룡이에게는 다방을 하는 양아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동창인 그 친구가 실수로 불을 내 학교 피아노를 태워버린 일이 생겼을 때 바보 승룡이가 대신 다 뒤집어쓰고 덮어줘 승룡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습니다.
승룡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좋아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지호라는 아이인데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게 꿈이어서 유학을 갔다 1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승룡이는 지호가 오기만을 10년째 언덕 위에서 기다리는 그런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지호는 승룡이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호는 사실 유학의 압박감으로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기대 때문에 그 사실도 말 못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지호는 조건 없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승룡이에게 점점 고마움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승룡이뿐입니다.
다시 피아노를 치기가 두려운 지호에게 승룡이는 초등학교 때 했었던 학예회처럼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학예회 때 무엇을 쳐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그냥 쳤었던 기억을 지호는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치던 노래를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이 승룡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지인이도 신장이 좋지 않습니다. 신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기적처럼 다방을 하는 양아치 친구 상수가 지인이와 신장이 맞아 하나 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를 질투하던 다른 조폭에 의해 그는 위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를 승룡이와 착각한 조폭들이 상수 대신 승룡이를 죽입니다.
이제 지인이는 지호와 상수가 지킵니다. 지호는 다시 피아노를 쳐서 그 돈으로 지인이의 학비를 대고 상수는 다방을 접고 승룡이가 운영하던 토스트 가게를 이어받아 지인이를 지켜줍니다.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화가 아니면 승룡이와 같은 그런 만화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승룡이의 바보 같은 사랑으로 지인이는 잘 지켜질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지인이를 돌보려 했다면 언제나 바보 같은 오빠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만든 친구들이 있어서 지인이도 오빠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는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피곤해서 잠만 자고 집안일도, 자신을 위해 놀아주어도 재미가 없는 그냥 그런 아버지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빠는 바보 같은 사랑으로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자녀에게도 사랑받습니다.
혼자 자녀를 키울 수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부모라는 두 명의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마음이 얼음과 같이 되어 냉병을 앓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녀를 어떻게 잘 키우겠습니까? 남편은 자녀들보다 우선 아내의 병을 고치려 노력하였습니다.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난로까지 피워야 하는 아내와 바보처럼 고통을 함께했습니다. 땀띠가 나면서도 자신과 함께 있어 주려 하는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여 아내는 심장의 얼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리고 냉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이 아내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들은 아빠를 고마워하게 됩니다. 엄마를 돌려준 분이 아빠라는 것을 아이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세포 안에는 아빠와 엄마의 유전자가 반반씩 섞여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사랑한다면(물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면 자기도 사랑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지만) 아이를 반밖에 사랑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한다면 자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빠는 이를 위해 아내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바보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치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세 번 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인 교회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만든 다음에 우리 양 떼를 돌보라고 파견하셨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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