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기리는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교회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째 되는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중 매체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교회의 사도직을 수행하고자 각 나라마다 홍보의 날을 제정하기를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1967년 ‘홍보의 날’이 제정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부터 기존의 ‘출판물 보급 주일’과 통합하여 해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홍보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주님의 승천은 주님께서 떠나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새롭게 찾아 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 위 몇 미터까지 올라가셨을 때 승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0미터? 아니면 1,000미터인가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면 될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수치로 측정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이라는 장소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눈앞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부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부활과 승천 또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떠나심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주님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분을 믿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대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승천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에게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땅의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고, 세상의 기준으로 나의 삶에만 집중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홍보 주일입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것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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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이 말해주는 비밀 :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있다>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날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향해야 할 방향이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이란 상징적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이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탈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은 자아로부터 탈출하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곳은 하늘이지,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우리는 악마의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탈출하고 이웃도 탈출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이 세상이 악마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면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여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이 허물어져 가는 세상에서 탈출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들은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세상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환경 단체는 자연을 살리자는 좋은 취지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자칫 이 세상이 전부인 양 활동한다면 그 환경 단체도 악마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고, 어쩌면 세상이 망하게 만드는 선봉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가 우리가 버리는 플라스틱으로 죽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환경 단체가 그렇게 주장하고 대부분 사람이 그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다거북의 코에서 빨대를 제거하는 동영상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고 죽은 고래, 남한 면적 14배의 쓰레기 섬과 같은 동영상을 보며 우리는 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 빨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바다에 버려져 바다짐승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플라스틱 빨대는 바다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0.03%에 불과합니다. 수치상으로는 당장 그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수준입니다. 더 중요한 쓰레기가 있는데 버려지는 양이 모든 쓰레기의 46%를 차지하고, 이것이 바다의 물고기를 죽이는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어부들의 ‘그물’입니다. 그물에 의해 수많은 물고기가 학살당하고 또 그렇게 버려진 그물 때문에 물고기와 바다 생물이 죽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에서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 생물이 사라지는 진짜 이유는 기후 변화 때문도, 해양 오염 때문도,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업 때문이죠. 하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플라스틱 때문에 죽는 바다거북은 연간 1천 마리로 추산합니다. 그러나 그물에 걸려 죽는 거북은 연간 25만 마리입니다. 그런데 환경 단체는 바다를 살리자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자고만 말합니다. 하루 동안 바다에 새롭게 쳐지는 그물은 지구를 500바퀴 돌릴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 얼마나 많은 그물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을까요?
일본은 고래잡이를 합니다. 그물망에 돌고래를 가둬놓고 무자비하게 학살합니다. 우리가 참치회라고 많이 먹는 참다랑어는 이제 거의 멸종 위기에 놓였습니다. 게다가 상어의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다 버립니다. 대부분은 샥스핀 요리를 위해 중국에 수출됩니다. 1시간에 1만 마리에서 3만 마리의 상어가 죽고 있습니다. 상어가 사람을 죽이는 숫자는 1년이 10명 정도입니다.
이렇게 바다의 포식자들이 사라지면 바다 생물은 멸종하게 됩니다. 상어가 사라지면 그 밑의 물고기들이 급증해 먹이 부족으로 멸종하게 되고 그러면 그 밑의 물고기들이 또 그렇게 되며 그다음에는 물고기들의 배설물로 사는 바다 식물들도 그렇게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1분마다 바다에서는 2조7천억 마리의 물고기가 잡히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2048년에는 바다에 어떠한 생물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전기차로 바꿔 타고 탄소를 줄인다고 해봐야 바다의 해조류나 바다 자체가 잡아놓는 탄소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와 같습니다.
결국, 바다가 죽으면 세상도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의 30% 정도는 어획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실제로 0.5%만이 보호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환경 단체들이 계속 플라스틱을 줄여야 한다고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해양 환경을 위한 환경 단체는 그 자금을 어업 협의회에서 지원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환경 단체들은 자신들이 받는 돈 때문에 세상이 이런 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당신이 알고 있는 바다 오염에 관한 진실은 모두 틀렸다’, 유튜브 채널, ‘엉준’]
이 세상이 악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환경을 통해 세상을 살리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리며 그 속에서 안위를 누리려는 마음이 있는 이들은 좋은 뜻으로 활동하고 있더라도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이 목적인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 해악을 끼칩니다.
우리 교회도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수백 년 갈 것 같은 커다란 건물을 짓고 영원할 것 같은 단체를 만들고 세상에 오래 머물려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매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유는 이 세상의 운명을 악의 손에 넘겨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다에 가라앉는 배와도 같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탈출하는 방법은 세상으로부터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배를 탈출하려면 배를 버려야 합니다. 배를 버림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죽는 것이 두렵다고 배만 꽉 붙들고 있다가는 진짜 죽습니다.
주님 승천은 우리 삶이 ‘탈출기’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앞서시어 홍해를 건너신 것이 승천의 의미입니다.
이 세상은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허물어지는 땅에다가 커다란 건물을 지어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주님 승천은 이 세상이 허무하고 악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빨리 탈출해야 하고 그 방법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임을 명확히 보여주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 승천은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의 상징입니다. 악마의 무게로 가라앉는 이 세상에서 오래 머물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 요한 2,15)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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