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로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유다의 자리를 넘겨받는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첫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고 이분이야말로 구세주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자신들에게 돌아올 부와 명예에 대한 자리싸움(마르 10,37 참조)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을 상황에 있는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기도(마태 26,56 참조)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이라 밀어붙이며 행동하고, 때로는 신앙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달아나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첫 마음은 어디에 갔나요?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이라는 시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라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첫 마음을 유지하고 간직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첫 마음을 되찾는 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또 다른 이들이 용서를 청하면 그것을 받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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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성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마티아는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도입니다. 그리고 성 마티아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의 자리를 교회가 스스로 다시 채울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곧 그리스도의 권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도인 것입니다.
성 마티아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권을 잃게 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가리옷 유다는 사도의 위치에 있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그리스도를 배신하며 사도의 권위를 잃었습니다. 어떠한 자리에 있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가 요구하는 소명을 채워야 합니다.
끔찍한 상상이겠지만 만약 영화 ‘에일리언’에서처럼, 태중에 있는 아기가 부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게 된다면 부모는 그 아기를 더는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자녀로서의 해야 할 일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녀는 부모의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부모도 자녀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가 당신의 ‘계명’(뜻)을 지키기만 한다면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당신께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자녀의 행복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에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기만 하면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사랑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기 때문에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느낀 것처럼 그런 천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로서 우리의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다 보니 이번 어린이날 어떤 아이가 1억 원이 넘는 작품 위에서 놀다가 작품을 훼손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물은 한국화의 거장인 박대성 화백의 작품이었습니다. ‘김생 임서’라는 작품인데, 김생의 글씨를 따라 쓴 작품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아버지는 아이가 노는 것을 보고는 말리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찍어줍니다. 박대성 화백이 어린이는 다 그런 것이라며 이해했기에 망정이지 아버지는 큰돈을 물을 뻔하였습니다.
부모는 왜 아이를 말리지 못했을까요?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그렇게 계속 잘못 나가면 결국 아이는 자신을 그렇게 키운 부모를 원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부모는 아이에게 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자녀 이기는 부모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존중의 법을 어긴다면 부모도 자녀의 모든 청을 다 들어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늘의 부모인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시고 싶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모든 청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일을 하나도 이룰 수 없게 되고 그러면 기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기쁨-평화’로 나가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면 기쁨도 평화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자산어보’(2021)는 천주교 박해로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과 청년 어부 ‘창대’의 갈등과 우정이 그려집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물에 관한 책을 써서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 하고 창대는 글을 배워 세상에서 출세하려 합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란 책을 내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12년간의 노력으로 탄생한 자산어보는 세계 최초로 수산 동식물을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한 책이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창대는 과거에 급제하여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그런 신물이 나는 세상을 등지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정약전이 마티아 사도로 비유된다면 세상 출세를 쫓으려 했던 창대는 유다의 모습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기쁜 삶일까요?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사는 삶일까요, 아니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삶일까요?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는 세상에 어떠한 이익을 줄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하고 독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길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소와 같은 인물이 마티아였다면 반대로 뱀과 같은 인물은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으로 살아야 사랑받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말하자면, 사실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성공합니다.
일본 최고 부자인 손정희 회장이 첫 딸을 낳았을 때 길어야 1년밖에 못 산다는 병을 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첫 딸이 그가 세상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딸의 미소를 보고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의 아이에게서도 자기 딸아이의 미소가 생기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딸의 병이 나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 알 때는 병을 얻어 1년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고 그 아이의 감사 편지를 받고는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선재단도 만들고 나누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됩니다. 병도 나았고 장수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책에 보면 성공하려면 자신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좋은 아이디어나 발명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생각만 하게 된다면 하느님은 실수를 통해서라도 그 바람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면 기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소가 되게 키울 것입니까, 아니면 뱀이 되게 키울 것입니까?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결국 행복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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