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간절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가 날마다 더 옳은 일을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 주님의 사랑인 은총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옳은 일인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당신 집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하느님 구원 업적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을 전하는 모든 이, 우리의 부모님, 형제, 친지, 그리고 우리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분과 일치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 줍니다. 주님과 일치한 이들이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성부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믿음과 사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항구함’을 잃어버리고 많은 시련과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 ‘항구함의 은총’을 얻으려면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노력은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와 관심과 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
<사람은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 더 사랑받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시고,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모두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청하는 것을 모두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사랑받는 가장 완전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분이 더는 ‘비유’로 말할 필요가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이름’은 곧 ‘본성’을 의미합니다. 태어날 때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또한 동시에 ‘본성’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기가 장난감 자동차를 끌고 길가로 나왔다가 경찰에게 잡힌 사진을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 어린 아기가 큰 자동차를 사달라고 부모에게 청한다면 부모는 들어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 더 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부모와 같은 본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겐 아직 ‘비유’가 더 필요합니다.
비유란 ‘표징’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신처럼 아이를 끌어올리기 위한 사랑의 표징이 바로 비유인 것입니다.
제가 며칠을 라면만 먹다가 물려서 어머니께 불평했을 때 어머니는 먹기 싫으면 젓가락을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서운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손에 고생해서 생긴 굳은살을 보고, 거칠어지고 비틀어진 손과 발을 보니 그제야 그 라면도 부모의 살과 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성장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렇게 더 높은 본성을 지닌 이들의 비유가 필요합니다. 굳은살이 곧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비유이고 표징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사랑의 표징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청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은 부모의 사랑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완전한 표징입니다.
그 표징을 먹고 마셔서 우리 안에 모셨다면 우리는 더는 표징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이때 기쁨에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미국의 유명 여배우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가장 아름답다.”
이 말 안에 숨긴 뜻은 무엇일까요? 여자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가장 사랑스럽다는 말을 내포합니다.
만약 여자가 끊임없이 남자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표징을 요구한다면 남자는 점점 지쳐갈 것입니다. 남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감이 없어서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믿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표징만 요구하고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그 상대에게 지쳐갑니다. 이 지침은 또한 이별을 전제하고 있기에, 곧 이별하게 될 사람에게 청하는 모든 것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진 자가 더 받게 마련입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더 사랑받습니다.
류시화 작가가 한 여성을 인도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그 여성도 인도에 여행을 온 여행객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의 비윤리적인 모습 때문에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주로 릭샤 비용이나 물건값을 속이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인도인들 때문에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인디어 욕설’이었습니다. 그들이 욕을 할 때 먼저 알아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지인들끼리 주고받는 말 속에 섞인 욕을 듣고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그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현지인들이 매우 놀랐고 그녀는 더욱 의기양양해졌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이제는 그녀를 슬슬 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가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가면 식당 주인은 식자재가 떨어졌다며 그녀를 거부했고, 알리바바 바지를 다른 가게보다 10루피(200원) 더 받으려고 했다고 심한 욕설을 들은 주인은 그녀가 다가오면 서둘러 문을 닫았습니다. 심지어 골목에서 재미있게 놀던 아이들도 그녀만 나타나면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인도 여행 중 얻게 된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류시화 작가가 몇 번 노천카페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언제나 혼자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욕설에 상처 입은 사람은 결국 그녀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인도 여행 중 그녀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모두가 군고구마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싫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적어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성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께도 사랑 받음을 믿기 때문에 더는 다른 비유나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다 좋은 이유가 있어서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레이스’란 아이는 어렸을 때 천연두가 걸려 얼굴에 심한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흉터가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라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부부가 모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남자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고 믿을 때 가장 사랑받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에게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얻어낼 수 있습니다.
더는 비유나 표징이 필요 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얻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고 항상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 본성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가 다다르기를 원하는 참 행복의 단계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