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 6,30-34)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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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마르코 6,30-34)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2.6.)

by honephil 2021. 2. 6.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대단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1597년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는 눈, 그 시선을 느껴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바라고 갈망하는 눈빛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눈과 군중의 눈이 만납니다. 그 만남 속에서 참된 목자, 착한 목자를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전해집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강조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고 다윗 임금은 노래합니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주님께서 목자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은총과 자애로 다가옴을 아름답게 읊어 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렇게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말씀을 마주하게 됩니다. 좋은 말씀, 위로의 말씀, 힘이 되는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체적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주하였을 때, 항상 일치되는 신앙을 체험하고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는가? 잔잔하고 고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예!”라고 확신하기보다, 말씀과 삶 사이의 거리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느끼는 거리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떨어뜨려, 스스로를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마주하셨던 군중,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다윗 임금. 주님을 향한 갈망을 지닌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둠의 깊은 골짜기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다면 깊은 골짜기는 두려움의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자리로 변화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참된 의미입니다. 나의 눈과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당신께서 목자이심을 알려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방향을 정해 봅시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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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공동체는 만들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는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보고 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하십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사람들은 육로를 따라 먼저 그곳에 다다랐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들을 당신께서 직접 가르치십니다. 이런 공동체가 가장 건전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를 위해 일한 이들은 쉬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치시고 먹이십니다.

 

      만약 집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 집은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를 않아.”라고 말하면 훌륭한 공동체의 리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지 않게 만든 잘못된 리더입니다. “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라고 자녀에게 말하며 자녀를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부모와도 같습니다. 훌륭한 부모라면 자신들이 없어도 하느님께 직접 힘을 얻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들은 자신들에게로 사람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쉴 수 있고 자신들이 더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어도 공동체가 잘 유지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가 점점 성장하게 만들어놓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열두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하여 하늘에서 쉬어도 교회는 점점 성장하였습니다.

      장예모 감독‘인생’(1995)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인생’은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남편 푸구이와 아내 자전 부부의 한 생애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일명 부잣집의 아들 도련님이었던 푸구이는 아내 자전과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매일같이 도박했습니다. 결국, 도박으로 룽얼이란 사람에게 집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내 자전과 자식들은 친정으로 떠나 버립니다.

 

      푸구이는 자신의 집을 빼앗은 룽얼에게 그림자극 도구를 빌려, 그림자극으로 생을 연명합니다. 도박에서 손을 떼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자전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남편 푸구이 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내전으로 푸구이는 전쟁터에 난데없이 끌려갑니다. 공산당에게 잡혀 포로가 된 푸구이는 그림자극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 주며 잘 버팁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큰딸 평샤는 열병으로 벙어리가 됩니다.

 

      공산당이 집권하게 된 이 시기 자신의 집을 도박으로 빼앗은 룽얼은 지주로 지목되어 인민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이 도박으로 집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자신이 죽었어야 함을 안 푸구이는 공산당이 정의를 실현해 준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후 대약진 운동으로 마을에서 철을 제련해 무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촌장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후 모든 철을 수집해 제련하게 되는데 푸구이는 이런 철 제련 현장 속에서 다시금 그림자극을 통해 재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깐이었습니다. 아들 유칭은 잠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꼭 학교에 가야 한다면서 졸린 아들을 등에 업고 학교까지 데려다줍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잘 들어봐. 우리 집은 아직 병아리야. 병아리가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면 양이 되는 거야. 양이 자라면 소가 되는 거야.”

 

“그다음엔 뭐야?”

 

“그다음엔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지는 거야!”

 

      이는 푸구이의 기승전결 식의 직선적이고 목적 지향적 리더십을 잘 말해주는 대화입니다. 하지만 그날 잠이 모자랐던 유칭은 트럭 뒤에서 자고 있다가 사고로 인해 죽게 됩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전쟁터를 함께 누볐던 오랜 아우 춘성이었습니다.

 

      이후 어른이 된 딸 펑샤의 혼처를 알아보게 되고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온 집안은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명언들로 가득하고 펑샤의 남편마저 노동자 계급으로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 발을 절기는 했으나 착실한 청년이었습니다.

 

      펑샤는 완얼시와 결혼 후 아이를 낳습니다. 병원엔 학생들뿐이었고 의사들은 자아비판을 위해 밖에 끌려나가 있었습니다. 푸구이는 만약을 대비해서 자아비판 중인 한 의사를 데려와 찐빵을 먹으라고 줍니다. 역시나 펑샤에게서 갑작스러운 출혈이 발생합니다. 학생들은 의사를 찾지만, 의사는 갑자기 찐빵을 먹다 목이 막혀 쓰러진 상태입니다. 이렇게 딸 펑샤도 죽습니다.

 

      푸구이 부부는 아들 유칭을 꼭 닮은 손자 ‘찐빵’을 키웁니다. 푸구이는 손자가 병아리를 가져오자 자신의 그림자극 소품이 있던 상자에서 병아리를 키우게 하며 이렇게 말해줍니다.

 

“병아리가 다 크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다 크면 양이 되지. 양이 다 크면 소가 되고 ...”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할머니인 자전이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다음엔 만두가 다 자랐겠구나.”

 

“전 소 등에 탈래요.”

 

“그래! 만두는 소 등에 타거라!”

 

푸구이가 말합니다.

 

“만두가 자라면 소가 아니라 기차, 비행기를 타야지! 그때가 되면 점점 더 살기 좋아질 거야.”

 

      이 마지막 대화가 감독이 말하려던 메시지일 것입니다. 푸구이는 한 인생을 거치며 인생관의 병화를 겪었습니다. 인간 주도적 리더십에서 섭리에 맡기는 리더십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푸구이는 처음에 가정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집을 빼앗기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 것은 시대의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푸구이는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지키려 하지만 시대의 힘이 딸 펑샤가 벙어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잠이 많은 아들 유칭을 자신이 그날 깨우지 않았더라면 유칭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찐빵을 주지 않았어도 딸은 살았을 것입니다.

 

      푸구이의 인생관은 자기 주도적이었고 목적 지향형입니다. 기승전결로 가며 공산주의가 자신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중국의 인생관이었고 이것은 모택동과 같은 생각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없음을 마지막 때에서야 깨닫고 시대의 힘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의 변화를 겪어야 합니다. 자신이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처음엔 자신의 힘으로 그 공동체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다 그 공동체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보다는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빠집니다. 공동체는 기승전결이 없습니다. 공동체의 봉사자들은 물이 흐르고 싶은 방향을 잘 찾아 길만 내어주면 됩니다. 그것을 계곡으로 만들고 시내가 되게 하고 강이 되게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공동체 리더들은 나의 목적지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길만 내주고 쉬면 됩니다. 내가 쉬어도 더 잘 돌아가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입니다. 자신이 사라지면 공동체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단체를 만들면 안 됩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https://youtu.be/-mUDIA6FFGM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  6,30-34 )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2.6.)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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