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마르코 복음서는 그 장엄한 시작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마르코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참된 신원은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각이 언급됩니다.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 이것은 나자렛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시각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상반된 두 관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과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의 긴장이 오늘 복음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그저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였을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마르 1,22 참조), 예수님을 훌륭한 분으로 인정합니다(마르 7,37 참조).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시각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만, 반대로 목수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하느님의 아드님? 아니면, 나자렛 출신 목수? 그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행위를 결정합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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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안다.”라는 말은 “너를 무시해.”라는 뜻>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다고 말할 때 이미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고 그 고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을 아는 것은 다른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 스마트폰을 만든 당사자뿐입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상대를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서로 상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선 얼마나 웃길까요? 우리는 결코 남을 안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만이 그 사람을 가두고 그 사람과의 더 친밀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전에 말씀드린 예화지만 이 내용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기에 한 번 더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후 토마스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네.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락 토마스에게 “난 널 알아.”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넌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던 직장 상사 중 누가 토마스를 진정으로 안 사람일까요? 토마스를 안다고 규정하지 않은 직장 상사입니다. 안다고 할 때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할 때 아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주에 관한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아주 어렸을 때라 광활한 우주의 흑백 사진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답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우주도 하나의 물체인데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신비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주도 모르는데 한 인간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믿음이나 희망, 더 나아가 사랑이 커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은 그 사람을 마치 새장에서 밖으로 새를 풀어놓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을 때 훨훨 날아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백종원 씨하면 떠오르는 것이 ‘설탕’이었고, 음식이 맵고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입관이 있는 사람들은 골목 식당에서 그의 레시피와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손님이 떨어지고 장사가 안되며 그 탓을 백종원 씨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백종원 씨는 남이 자신을 안다고 할 때 거기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만 피해를 봅니다. 절대 내가 인간을 안다고 규정하여 그 인간을 안 하느님까지 안다고 규정하는 교만의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하느님까지도 내가 만들어낸 한계에 가둬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남이 나를 안다고 말할 때 그 말에 갇히지 맙시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십시오. 나를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를 안다고 나를 규정하는 사람을 벗어나야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만든 하느님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믿고 희망할 수 있게 되며 그래야 사랑이 증가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는 자신도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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