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주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는 참으로 놀라운 구세주 강생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으로 모자라, 사람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갓난아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길을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셨던 것입니다.
정결례가 끝난 뒤에 장면이 전환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 시메온은 ‘시메온의 노래’를 부르면서 구세주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음에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이렇게 두 개의 손길과 마주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손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품에 안는 두 팔입니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도움과 손길을 요구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두 팔로 따뜻하게 안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우리의 손길과 도움을 청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두 손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아울러 오늘은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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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녀로 봉헌되지 못했을 때 받아야 할 고통>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특별히 봉헌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봉헌 생활을 축성 생활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밀떡과 포도주가 봉헌되면 그것이 성체와 성혈로 축성되는 신비를 인간도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밀떡과 포도주도 사제를 통하여 제단에 봉헌되지 않으면 주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가장 완전한 사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봉헌은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지 그 모범이 됩니다. 자녀를 자신의 아이로만 여긴다면 자녀는 축성될 수 없어서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것은 알겠는데, 아직 온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니라고 느껴 혼란에 빠집니다.
온전히 자녀가 아니라고 느끼면 하게 되는 것은 ‘경쟁’입니다. 자녀들이 경쟁하는 이유는 진짜 자녀가 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경쟁은 고통스럽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녀들끼리도 경쟁하면 그렇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더 자녀답다고 그리스도와 경쟁하였습니다. 하지만 참다운 자녀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6살 여자아이 ‘프리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삼촌과 숙모가 사는 시골집에 맡겨집니다. 삼촌과 숙모는 불쌍한 프리다를 자신의 딸처럼 여기려 노력합니다. 둘 사이에는 ‘아나’라는 어린 딸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시골 삼촌 댁에 맡겨진 프리다에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삼촌과 숙모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프리다는 사촌 동생 아나에게 자신의 인형들을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이 그만큼 많이 사랑받는 증거라고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나가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리다는 서투른 화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흉내를 내며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엄마 담배를 성모 마리아께 바치며 엄마가 좋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아직 삼촌과 숙모를 참으로 아빠와 엄마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프리다의 삼촌과 숙모는 프리다에게 잘 대해주지만 프리다는 자신의 외로움을 관심으로 채워보려 노력합니다. 신발끈을 묶을 줄 알면서도 일부러 숙모에게 묶어달라고 하고, 상추를 가져다 달라는데 아나보다 더 먼저 밭으로 뛰어가 양배추를 뜯어갑니다. 그러나 숙모는 프리다의 마음을 압니다. 목욕하며 삼촌의 관심을 끌어보려 하지만 삼촌은 아나의 머리를 먼저 말려줍니다. 냅킨을 식탁 밑으로 숨겨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삼촌과 춤을 추는 아나가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프리다는 아나와 경쟁의식을 느낍니다. 아나가 놀아달라고 하는데 잘 놀아주지 않습니다. 프리다는 그런 아나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나무 사이에 숨어있으라고 하고 집으로 혼자 돌아옵니다. 숙모가 아나를 찾지만 프리다는 숙모에게 미움을 살 거 같아서 아나를 못 보았다고 말하고 아나를 찾으로 숲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하지만 아나는 팔에 깁스하고 숙모의 팔에 안겨 돌아옵니다. 숙모는 모든 것을 다 알지만 프리다에게 혼을 내거나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숙모에게 미안해서 화단에서 꽃을 꺾어 선물했지만 그 꽃은 숙모가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프리다는 몸이 좋지 않은 숙모 곁에서 숨을 쉬는지 코에 손을 대봅니다. 엄마처럼 숙모를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나는 프리다가 수영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뛰어듭니다. 간신히 삼촌이 건져내어 괜찮을 수 있었지만 졸지에 모든 게 프리다의 잘못이 되었습니다.
프리다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자신을 사랑해 줄 가족을 찾아 떠나겠다고 가출을 감행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아나는 “난 언니 사랑해.”라고 말합니다. 삼촌 부부는 프리다를 찾습니다. 프리다는 어두워서 멀리 못 가고 다음 날 다시 나가겠다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숙모는 이런 프리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언의 위로를 해 줍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며 프리다는 조금씩 삼촌 부부의 가족이 되어갑니다.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프리다는 엄마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숙모에게 묻습니다. 그런 것을 숙모에게 물으면 안 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숙모는 엄마가 프리다를 매우 사랑했다고 말해줍니다.
프리다는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삼촌 부부와 아나와 정신없이 재미있게 뛰어놉니다. 아나를 질투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미 한 가족이 되어버린 자신을 보고는 그동안의 심경과 행복이 겹쳐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이것이 프리다가 원했던 행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카를라 시몬 피포’ 감독이 어릴 적 자신의 경험을 옮긴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이라는 영화 줄거리입니다.
잔잔한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프리다의 눈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혼자만 뒤처졌다는 느낌에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고 질투하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해봐야 점점 주위 사랑을 잃고 더 외로워지게 됩니다. 주변인으로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 부모의 사랑으로 평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사춘기 전까지입니다. 사춘기가 넘으면 새로운 부모가 필요합니다. 그 이전에 부모는 자녀를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의 가족이 이미 되었다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당에 다녀도 프리다처럼 주변인처럼 살아갑니다. 뒤처졌다고 느끼고 경쟁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런 상태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경쟁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만 채운다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행복이 모든 행복의 기반을 이룹니다. 사춘기 전에는 인간의 부모가 주는 가족의 행복, 그 이후에는 하느님 부모가 주는 가족의 행복입니다. 우리 부모는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그런 마음으로 살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라고 자녀들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녀의 인생은 프리다의 여름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드님을 하느님께 바로 봉헌하신 성모 마리아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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