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마르코 6,14-29)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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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마르코 6,14-29)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21.2.5.)

by honephil 2021. 2. 5.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나머지 그녀와 혼인하고 싶어 하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데키우스 황제 박해 기간(249-251년)에 순교한 아가타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구약의 구원 역사를 마무리하며, 신약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루카 16,16)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헤로데라는 권력자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참수를 당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의 삶과 비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의 선포를 수용합니다(마르 1,2-4 참조). 그 옛날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은 삶의 마지막 모습도 닮았습니다. 이사야는 므나쎄 임금의 폭정을 거슬러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참수를 당하였고,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임금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외침은 참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약한 사람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렇게 약한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예언자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언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요? 그 음성과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를 변화시켜 봅시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을 향하였던 마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외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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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모세와 같은 예언자 등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헤로데는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요한을 대신해 보복할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피해의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자신이 그러면 남도 그런 줄 압니다.

 

      나자렛 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욕구가 악이요 눈을 가리게 만들어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슬로는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망치를 내려놓기 전에는 그리스도 공동체까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종교에 대해서 본다면 “모든 종교는 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결국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은 ‘욕망’입니다.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은 그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장애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눈이 멀어버립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도 이 욕망 때문입니다. 그는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 살려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에 대한 욕정과 자존심이 요한을 죽이게 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메시아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들 자존심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1412-31)는 17살의 나이에 100년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을 종식한 주인공입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잔 다르크는 13세 때 처음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 성인과 천사들을 봅니다. 성인들은 잔 다르크에게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는 영국군을 물리치고 프랑스의 황태자를 전통 관례에 따라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우라는 사명을 줍니다.

 

      글도 모르고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잔 다르크가 영국군을 몰아내고 한 사람을 국왕으로 앉히라는 사명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을 믿고 또 그렇게 했기에 교회에서 그녀가 받은 계시가 진짜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엄청난 성곽에서 소리치는 영국군을 직접 나서서 섬멸하고 영국군이 점령한 지역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랭스에게 황제가 대관식을 하게 만듭니다. 군인은 물론이요, 모든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앙합니다.

 

      마지막 남은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때 지원군이 필요했지만 새 황제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습니다. 황제가 되니 더는 잔 다르크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황제는 영국과의 화평을 원합니다. 영국은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프랑스에 큰돈을 받고 넘기려 했으나 프랑스는 거절합니다. 황제가 되기 전엔 잔 다르크의 계시를 믿는 듯했지만, 필요가 없어지자 토사구팽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영국의 패배를 안겨준 잔 다르크를 영국은 가만히 놔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형 죄목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잔 다르크는 자신의 칼로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전술과 함께 사기를 북돋운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도 밀리지 않습니다. 주교는 잔 다르크의 고해성사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종교보다 정치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합당한 죄목도 없이 헛된 환상에 사로잡힌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합니다. 그때 나이 19세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버려졌고, 적국에서도 버려졌으며, 심지어 교회에서도 버려졌습니다. 무려 500년이 지나서야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잔 다르크는 정치에 그렇게 희생되었지만 100년이라는 긴 전쟁을 종식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린 소녀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셨을 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하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헤로데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각자의 욕망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처럼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그리스도와 참 교회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빼앗습니다.

 

      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바오로처럼 하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빛으로 자신의 욕망이 불타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 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저도 처음엔 성당에 다니면서도 뱀의 욕구를 쫓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다 읽고는 닮고 싶은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책을 다 읽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닮고 싶어 졌습니다. 이는 욕구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공동체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뜻을 채워줄 도구로 보였던 것이고 이후에는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닮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동체로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나를 바꾸고 구원해 줄 공동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욕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의 길입니다. 나의 모든 욕망을 죽일 때 하늘의 빛이 보입니다. 그 빛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안내합니다. 나의 욕망들을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은 영원히 가려져 있을 것입니다.

https://youtu.be/Q_gxswcDcP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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