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20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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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2020.8.22.)

by honephil 2020. 8. 22.

1900년 무렵부터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로마 전례력의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의 주요 호칭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몇 번을 제외하고는 예수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쓰십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인간 존재나 인류를 가리킵니다. 특히 에제키엘서나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구별된 이로 ‘보통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호칭을 다른 의도로 당신께 사용하셨습니다. 이 호칭은 그분의 인성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수행하신 메시아 사명을 통하여 드러난 존엄한 신성까지 모두 담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지니고 계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버림받고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의 신분과 사명을 가지고 계심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겸손한 섬김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잔칫집이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만을 좋아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1요한 3,1 참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보통의 인간으로서 ‘사람의 아들’로 불린 에제키엘은 영광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천상 어좌를 보았습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예수님의 명을 우리가 따른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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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와 겸손의 4단계>

 

      사람 아이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늑대를 자기 아버지라 믿으면 그 아이는 본성이 사람일까요, 늑대일까요? 사람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은 자기가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자신을 늑대라 믿으면 늑대처럼 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며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친히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라고 하며,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가르칩니다. 본성에의 참여가 자신이 아버지의 본성을 가졌음을 믿을 때 발휘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며 그것은 교만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믿으라고 하신 오늘 복음은 겸손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하면 과연 교만일까요, 겸손일까요?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라는 영국 의사가 4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풍자해 출판 즉시 금서로 지정된 풍자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4개의 섬을 여행하면서 바뀌는 주인공의 시각을 그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겸손의 단계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책의 순서대로 설명해 드릴 테니까 내가 걸리버라고 생각하고 언제가 가장 겸손한 때였는지 그 순서를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에 표류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손가락만 합니다. 걸리버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들 식량의 1000배가 넘는 음식을 먹으니 밥값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들의 배가 공격해오자 50척이 넘는 배를 줄로 엮어서 끌고 옵니다. 그렇게 소인국의 영웅이 됩니다. 사회를 위한 공헌자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표류지는 ‘거인국’입니다. 그는 거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커스를 하며 지냅니다. 주인의 배를 채워주어야 자신도 먹고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한없이 작아집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살던 나라는 비리와 폭력이 난무했다고 자아비판을 하며 그들을 높여줍니다. 조금은 비굴하지만 그래도 이웃을 높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표류지는 떠다니는 섬, ‘라퓨타’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섬에는 정치인과 학자들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은 굶어 죽고 있는데도 학문과 문화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걸리버는 그들에게 분개합니다. 정치만 비판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섬은 거짓말을 모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말들이 사는 곳입니다. 말들의 섬입니다. 그런데 또한 야후라는 괴수들도 있습니다. 야후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짐승의 손과 발을 가졌습니다. 너무 자기만 알아서 5마리에게 50인분의 음식을 주어도 그들은 서로 먹겠다고 싸우며 죽입니다. 사랑 지극한 말들과 그 괴수들 앞에서 자신이 그 괴수 중 하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말처럼 살려고 네 발로 걷고 말의 목소리도 흉내 냅니다. 모습은 괴수지만 말들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자, 결정하셨습니까? 우선 겸손과 가장 거리가 먼 섬은 어디일까요? 걸리버가 겸손의 길을 시작하지 않았을 단계입니다. 바로 세 번째 하늘을 나는 ‘라퓨타’섬입니다. 걸리버는 정치인들은 비판하면서 자신은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정치인들 비판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방인들처럼 겸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소인국’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는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을 돕지만,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아 자신만 커집니다. 겸손보다는 아직은 교만이 지배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거인국’에 갔을 때입니다. 이때는 이웃이 있으니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들어 높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겸손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자기는 작아지고 이웃은 크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높여주려고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하다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져야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아직 참 겸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단계의 겸손은 ‘천국 백성이 사는 섬’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하느님 자녀라 여기고 그렇게 거짓 없이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드님인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자신은 괴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괴수 같은 사람들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이 단계에 오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어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인간이라고만 믿었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어볼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이라 물 위를 걷는데,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가 걸었다가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 가장 겸손해집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이것이 구원의 핵심교리입니다. 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말이고,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이라 믿어야 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이라 믿어야 신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여 신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마치 인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처지를 인식하는 아기처럼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https://youtu.be/LkvMLPWbgUw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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