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쉬우냐?” 어느 쪽이 쉬운 것일까요.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만 있는 권한으로 다른 이에게는 불가능하지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은 결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로 일어나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결과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하기에는 더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시며 당신 자신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풍 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갑니다. 오늘 복음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권한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는 더 어려운 일을, 실제로 그가 병이 나아서 걸어가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았다.” 하신 말씀 역시 이루어질 수 있고, 예수님께도 하느님처럼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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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나를 편하게 대했으면 좋겠나요, 아니면 어렵게 대했으면 좋겠나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센 척하고 권위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에게 격식을 차리는 사람과 무작정 뛰어와서 안기는 아이 중, 누구를 더 좋아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그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예의를 차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죄를 지었어도 어쩌면 뻔뻔하게 당신 앞에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몸을 가렸고 나무 뒤로 숨었고 이웃을 더 나쁜 사람으로 심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유혹한 하와를 만들어주신 하느님도 원망하였습니다. 사실 나중에 나를 공격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나에게 가장 격식을 차리는 사람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평신도분에게 사람들 앞에서 공격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제들에게 누구보다도 깍듯한 예의를 차리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어른 신부님에게 예의가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저는 그분을 아버지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술자리에서 사제가 사제답지 않다고 심하게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저는 고개 숙이고 깊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제를 보며 기분 흡족해하셨습니다.
윗사람에게 지나치게 깍듯하게 대하는 사람은 아랫사람들도 자신에게 그렇게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 주위에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만 있게 됩니다. 두려워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에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윗사람을 물어뜯을 수도 있습니다. 개도 사람을 물 때 두려워서 그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두렵지 않으면 굳이 공격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주위에 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를 물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린이처럼 다가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사람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는 것에 대해 하느님을 모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절대 인간에게 내어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욕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부모가 무서운 분이라고 여기면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면 부모를 자비로운 분으로 여기고 부모 앞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알렉산더는 자신들의 백성에게 인기순위 2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기순위 1위는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였습니다. 그는 술통에서 살면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신하를 보내어 디오게네스를 불러오라고 했는데 디오게네스는 정 보고 싶으면 왕이 직접 오시라고 전했습니다. 화가 난 알렉산더는 술통에서 자는 디오게네스를 직접 찾아왔습니다.
“내가 두렵지 않은가?”
술통에서 잠을 자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가리는 왕을 짜증 나는 모습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좋은 분입니까, 나쁜 분입니까?”
“당연히 좋은 사람이지.”
“그런데 제가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햇빛 좀 가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하느님 자체를 두려워함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정말 감사해 죄를 지을 것을 두려워하는 은혜입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디오게네스가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다른 신하들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알렉산더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굽실대는 사람 중에 뒤에서 칼을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나를 자신의 스트레스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 스트레스가 한계에 다다르면 나를 물려고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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