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8-34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복음서가 전하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 업적에 대한 예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현실의 삶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해방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결국 병자의 치유는 우리를 해방시키신 예수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치유 이야기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고칠 수 없었던 병자들을 치유하십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악령이나 마귀에 의한 것이든, 손쓸 수 없는 이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이것으로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능가하는 힘과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드러나지만, 오늘 복음은 아주 뚜렷하게 마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밝혀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마귀의 외침은 마치 훌륭한 신앙 고백처럼 들립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지만 이미 마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에도 고을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차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마귀의 고백을 통하여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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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청년들이 찾아와서 식사하며 연애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 한 청년이 자신이 소개팅을 시켜주면 성사될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비법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히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소개팅을 시켜줄 때,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하느냐?”, “연봉은 얼마나 되면 좋겠냐?” 등을 물어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이것만 아니면 된다.”라는 것 하나만 말해달라고 한답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보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키 작은 것은 용납 못 해.”라고 한다면, 대상 중에 키 작은 사람은 제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단 만났을 때 비호감은 아니니까 말이 통하고 말을 하다 보면 정이 든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면을 갖춘 사람을 소개해주면 그 사람 안에서 싫은 면도 발견하게 되어 처음엔 좋았다가 금방 싫어져 헤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어떤 면이 특별히 좋아서 만나기보다는 자신이 싫어하는 면이 특별히 없어서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젊은 남자들은 예쁜 여자면 다 좋아하는데, 그래서 결혼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격은 영 자신과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도 때는 늦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느냐보다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느냐를 알아서 그것을 쳐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워런 버핏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싶은 것 25개를 적어서 5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는 방법을 씁니다.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주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주식들은 쳐내고 마지막 남는 것을 선택하여 투자합니다. 그의 투자방식은 돈을 많이 버는 데 있지 않고 손해를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좋은 것을 하는 것보다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보다, 내가 싫은 사람을 선택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장점을 키우려고 노력하시기보다는 우리 단점을 제거하시려는 데 더 노력을 기울이십니다. 과일나무가 있다면 굵고 튼튼한 가지를 더 튼튼하게 자라도록 신경 쓰는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쓸데없이 에너지만 축내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을 쳐내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쓸데없는 것들을 쳐내다 보면 자동으로 좋은 가지는 더 좋아집니다. 좋은 것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나쁜 것을 쳐내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쳐내고 싶은 나쁜 가지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우상 숭배자가 되게 만드는 자아의 가지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다라인들의 가장 문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떼를 그들이 키우는 돼지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그것들을 물속에 바쳐 죽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하나가 있다면 바로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버려 당신을 그 우상을 섬기는 데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느님을 자신들 종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우상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가 우리를 우상 숭배자가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이 가지치기하러 오시는 예수님이 싫다면 가다라인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청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가지들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바쳐야 했던 선악과와 같습니다. 결국, 그것을 바치게 하지 못하는 장본인은 우리 안에 있는 뱀입니다. 자아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쳐내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들의 배를 채우기를 바란다면 그것들을 쳐내려 오시는 예수님을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욕구 가지치기만 할 수 있어도 내 안의 성인의 본성은 저절로 더 완전해집니다.
내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부터 가지 쳐 나가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거든 하기 싫은 것부터 가지 쳐 나가십시오. 문제는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좋은 곳에 집중되려면 그것을 허비시키게 만드는 것들부터 가지치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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