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그녀에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초대 원장이었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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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군중들의 행동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온 지방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군중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필사적으로 자기가 아는 병자들이 낫기를 간절히 청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마을에 새로운 가게가 생겨 호기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 계산대에는 하느님께서 계셨습니다. 놀란 부인이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팔고 계시는지요?” 하느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답니다.” 부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잠시 뒤에 말을 쏟아 냅니다. “행복을 사고 싶습니다. 사랑과 평화도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도 주셔요.” 그러더니 또 덧붙입니다.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제 이웃을 위해서도 사고 싶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여기서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씨앗만 팔고 있답니다.”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바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라는 만큼의 필사적인 간절함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있습니까? 그분을 만나려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자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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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날수록 삶은 더 긍정이 된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학기 초에 ‘우수한’ 아이들로 편성된 학급이 ‘열등한’ 학급으로, ‘열등한’ 학급은 ‘우수한’ 학급으로 컴퓨터에 잘못 입력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교는 5개월이 지난 뒤 학사관리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황한 학교측은 컴퓨터의 오류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 학기말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결과가 놀랍게 나왔습니다. 원래 우수한 아이들의 성적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기 내내 선생님들에 의해 열등하고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둔한 학급의 점수는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대단히 우수한 아이들로 여기고 교육하였고, 그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되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본인 안에서 샘솟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믿음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삶으로 그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돌아갑니다.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라는 책을 쓴 울리히 슈나벨은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삶의 결과는 자기 확신이 자아내는 생각을 증명해 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애인과 헤어졌다면 그는 이미 생각으로 자신은 애인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애인과 헤어지며 ‘거봐, 결국 내 생각이 맞았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좀 황당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일면 맞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대로 되는 게 세상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병든 이들을 데려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해 주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고, 사실 그 믿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은 이들은 정말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큰 긍정입니다. 더 큰 믿음입니다. 작은 것을 들어주시면 큰 것도 들어주실 것이란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유되게 하신 데에는 그들의 희망을 꺾지 않아서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희망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을 가까이하며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고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롱펠로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롱펠로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도 롱펠로가 사과나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예수님께 청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신 것 같지만 안 들어주시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안 들어주셨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고 다 들어주셨다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더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 자비와 만나면 더 부정적으로 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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