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묵상 ]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주님 성탄 대축일 밤 (2019.12.24.)
복음 말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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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12월 24일
주신 말씀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카 1,67-79)
노래는 우리들이 살고 견디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세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 사제가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면 노래합니다. 이 노래 역시 마리아의 노래, 시므온의 예언 노래와 함께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주님 오시는 밤을 기다리는 성탄 전날 아침에 불리워질 자리를 마련합니다. 성무일도 조과에서 불리워지는 이 노래, 빛이신 주님을 앞서 예비한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관련되어 아주 적절하게 전례 안에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하지만 늘그막에 이르러 감히 기대하지도 못한 아기를 얻게된 아버지의 기쁨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 당대에 고통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찾아 오시는 해방자 주님께 대한 신앙의 찬가이기도 합니다. 다윗 가문이 기다려온 구세주가 이제 일으켜지고, 오랜 기간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감지한 이의 노래입니다. 모든 악을 쳐부실 분, 예전에 약속된 그분, 온갖 삶의 질곡에서 건져 내실 분,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항상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분, 그분을 향한 뜨거운 희망이 솟아나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어둠에 잠겨 본 자만이 부를 수 있는 힘이 넘쳐납니다. 억눌려 본 이의 가슴 아픔이 묻어 있습니다. 이제 바랄 것이라고는 주님 한 분 뿐이신데, 그분만이 참 빛으로 오시리라는 것을 알게된 이의 넘치는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항상 뺏기기만 한 이들이 자신에게 전부를 베풀어주시는 그분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아픔을 겪어 본 이들만이 외칠 수 있는 해방가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는 아침, 지금 교회와 세상은 평화의 길로 우리 발을 이끌어 주시는 주님으로 인한 기쁨에 넘쳐있는가? 평화로운가?-묻습니다. 주님 탄생을 기다리는 오늘이건만, 여전히 교회는 불안정하고, 무력하기까지 합니다. 왜 변화되지 않는가? 답답한 모습도 있습니다.
명동에 살 때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저는 명동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시간, 신자들이 잔뜩 종종걸음으로 내려옵니다.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주신 하느님의 말씀과 성찬으로 채워져 내려오는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심히 얼굴들을 쳐다보는데, 편안하고 미소띤 얼굴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더러는 옆사람과 얘기하며 내려오는 이들 중에 얼굴 표정이 살아 있는 경우는 조금 있었지만, 대다수는 화난 얼굴, 싸우다 온 것 같은 얼굴들입니다. 이래서야 쓰나, 구원자를 일으키시고,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고, 몸소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나고 오는 한주간의 가장 아름다운 그 순간의 기쁨이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싹 잊어버려진 것은 아닐까? 의무적인 발걸음이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상은 주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얼굴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본당에는 단위 면적당 세상에서 제일 성형외과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형외과가 대로변은 물론이거니와, 동네 골목에도 여럿 있었답니다. 일본, 중국에서 성형을 목적으로 원정여행단도 오곤 한답니다. 그러니 본당에 부임하기 전, 우리 성당 자매들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살짝 내심 기대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니더라구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화장’도 세대별로 다르답니다. 10대의 화장은 치장, 20대는 그대로 화장, 30대는 분장, 40대는 변장, 50대는 위장, 60대는 포장, 70대는 환장, 80대는 끝장이랍니다. 우린 그렇게 분칠하고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기도와 찬미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렇게 보고 있는 니 얼굴은 어떤데,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방에 돌아와서 세수 하고 나서 거울을 보았습니다. ‘음, 아직 괜찮군! 나름 동안이야’ 그랬을까요? ‘요새 이것저것 한다고 신경 썼더니만 얼굴이 상했네’ 그랬을까요? 하여간 ‘미소짓는 연습을 해야겠군’ 생각했습니다. 눈꼬리를 살짝 내리고, 입술은 살짝 벌려서 이가 보일듯 말 듯, 그렇게 연습했습니다. 굉장히 어색했습니다만, 나의 얼굴이 하느님을 만난 그 사람의 표정을 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므로 즈카르야의 입을 빌어 우리도 행복에 가득찬 표정을 지으면서 노래합니다. 성무일도의 즈카르야 노래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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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사의 독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의 광채로 이 거룩한 밤을 밝혀 주셨음을 전하는 소식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시련과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빛이 비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예언자는 이 빛이 기쁨을 주는 이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이 빛은 기쁨과 희망을 주는 구원의 빛입니다. 그 아이는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왕좌에서 다스리러 올 것입니다. 이사야 신탁의 첫 번째 성취는 아하즈 임금의 아들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성취는 이런 장엄한 신탁의 가치를 채워 주지 못하였고, 오랜 세월을 두고 메시아 탄생의 예고로 이해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 곧 하느님의 무상적이고 인자로운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성탄에 우리 세상을 밝혀 주는 것은 바로 모든 이에게 구원을 전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복음에서는 밤을 지새우는 목자들이 있었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음을” 알려 줍니다. 어둠 속의 빛, 밤을 밝혀 주는 빛이라는 주제가 떠오릅니다. 이 빛은 전혀 예기하지 않은 특별 현상, 곧 신적 개입을 드러내는 현상이기에 목자들은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비로소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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