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묵상 ]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대림 제4주일 월요일 (2019.12.23.)
오늘의 복음 말씀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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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12월 23일
갓난 쟁이의 할례식에 일가친척이 죄다 모였습니다. 늦둥이에 귀한 자손이었습니다. 대가 끊길 줄 알았는데 천금 같은 녀석이 태어난 것입니다. 가문의 관심과 사랑을 담뿍 받게 된 아이였습니다. 지금으로 하자면 아마 유아 세례식 정도에 해당하는 날이었겠지요. 유아 세례 때도 이름을 정합니다. 세례명, 하느님 앞에서 불릴 이름을 부모가 정해 옵니다.
얼마나 고심하며 지어 오는지, 가끔 제게 자문도 구합니다. ‘신부님, 길한 세례명을 골라 주세요.’ ‘엥! 이 무슨 소리?’ ‘그 있쟎아요. 명도 길고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두루두루 좋은 그런 세례명이요.’ 저는 난감합니다. 그렇게 산 성인을 알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고 아이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은 알겠으나, 도대체 하느님께 구하는 행복이 고작 그런 것인가 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도 잠시 고민합니다. 참수형이나 유배형이나 뭐 그렇게 험하게 순교한 성인들 빼고 모함과 질시 속에 고생했던 성인들 빼고 단명한 성인들 빼고 이렇게 다 빼다 보니 몇 남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빼고 고심하여 그나마 몇 성인들을 골라드리면 또 그럽니다. ‘신부님, 그런데 좀 예쁜 이름의 성인은 이 중엔 없네요?’ 정말 그 부모에게 면박을 주고 싶습니다. ‘아니, 그럴 거면 왜 나한테 작명해달라고 그래요’ 물론 속으로만 그러죠. 그만큼 부모에게는 자기 아이의 모든 것이 다 소중하기 때문이라 이를 부득 갈며 이해하려고 하죠.
오늘 즈카르야 집안의 이 귀한 아이의 이름을 정할 때도 논란이 벌어집니다. 즈카르야 주니어, 우리 식으로 하자면 항렬따라서 지어야 마땅하다는 가문의 어른들의 의견이 강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되는 즈카르야는 고개를 젓습니다. 그는 의심을 품었던 탓에 천사의 방문 이후 강제로 함구령에 처해진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서판을 달라고 하여 거기에 ‘요한’이라고 아이의 이름을 적습니다. 그리고 아이 어미 엘리사벳은 그 작명에 동의합니다. 곧 새 이름으로 새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거의 공상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난데없이 ‘서판’에 주목했습니다. 즈카르야가 쓸 것을 달라 하였을 때 누군가가 내준 것이겠지요.
몇 년 전에 모 본당에 판공성사를 갔을 때의 기억이 났습니다. 성탄은 다가오는데 그 성당은 가건물 상태였습니다. 그날은 너무 추운 날이었습니다. 고해틀을 제의방에 가져다 놓았는데 거의 한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찬바람 숭숭 들어오는, 예수님 마구간 같은 고해실!! 한참 앉아있자니 손발이 시려오고 안면근육도 마비되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고 잠시 쉬는 시간에 성당으로 나갔는데, 마침 본당 수녀님들이 아기 예수님 모실 성탄 구유를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혹시 전기히터같은 것 없느냐고 요청했습니다. 일에 몰두하던 수녀님, 저를 쓱 보더니만 단호하게 ‘없는데요’ 한 마디 쌩 말하고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세상에, 차갑기도 해라’ 서너 시간 동안 완전히 동태처럼 되어서 고해성사가 계속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뭐라도 줄 줄 알았는데’ 어안이 벙벙하더라고요. 그 본당이 지금은 번듯하게 신축하였는데 가끔 그 수녀님 생각이 납니다. 나중에 다시 어디선가 보게 되면, 꼭 말하려고요. ‘그때 왜 그러셨어요’ 너무 서운했던 것이죠.
즈카르야에서 서판을 주었으니 망정이지 어쩔 뻔 했습니까? 세례자 즈카르야 될 뻔했습니다. 역사는 그런 사소한 것으로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새 이름을 얻은 요한, 그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갑니다. 익숙한 것과 진부한 것은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아마 익숙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부한 이름이었다는 것이죠. 새 시대에는 걸맞지 않은 이름이었습니다. 요한은 진부한 역사, 옛 시대를 마감합니다. 그래서 새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얻은 새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 자들입니다. 새 이름을 얻었으니 이름값 좀 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탄이 코앞입니다. 주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셨나요. 내가 받을 선물이 아니라. 성탄은 주님의 생신이니 말이죠.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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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복음 묵상
(루카 1,57-66)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때에 아기의 이름을 짓는 대목이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자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고 그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묻자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고 복음은 전하였습니다.
즈카르야의 경우는 천사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자신과 아내가 나이가 많았다는 생각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말문이 막히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 그때 비로소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호의’라는 뜻이라고 전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려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마치 내 마음의 창문을 열면 찬란한 빛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수 있지만 창문을 꼭꼭 닫아걸고 두꺼운 암막과도 같은 커튼을 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전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의 영을 받아들이고, 또한 그분의 말씀대로 모든 삶을 이루어 갈 때 우리도 역시 참된 구원의 여정을 이루어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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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나쁜 목자들에 맞서 쓴 말라키 예언서(기원전 5세기)의 말씀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종교 재건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사제들은 부패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시어 정화의 불로 경신례를 새롭게 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마음을 돌리면서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주님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그리고 작명에 관하여 들려줍니다. 요한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의 호의’ 또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를 뜻합니다.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이름은 한 사람의 사명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지향하여 선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끊임없는 호의를 그의 인격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만큼 그분의 직접적인 선구자가 되는 사명과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통하여 계약을 충실하게 기억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를 뜻합니다. 이 세 주인공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위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그들 이름은 주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루카 1,17) 와서 마음의 회개를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닌 백성을 하느님께 준비하였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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