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르코 12,1-12) -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2023.6.5.)
by honephil2023. 6. 5.
[묵상]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르코 12,1-12) -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2023.6.5.)
보니파시오 성인은 675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회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성인은 특히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보니파시오 주교는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웠다. 성인은 선교 활동에 주력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결국 소작인들이 합당한 소출의 일부를 봉헌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그 포도밭의 상속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인 그리스도를 죽이게 될 것인데 그 방법이 소출의 일부를 봉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는 처음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은 것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음이 결국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는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채는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야곱은 레베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야곱의 장자권을 가로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콩죽은 왜 주어야 했을까요?
불콩죽은 야곱의 입장에서는 장자권이 에사우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사우는 그 불콩죽을 먹고 자신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줄 수 있음을 인정해줍니다. 야곱에게 자신의 축복을 빼앗겼을 때 에사우는 무슨 힘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요?
‘아, 그때 불콩죽을 먹고 장자권을 팔았었지!’
불콩죽은 야곱이 에사우가 상속권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였고, 그 불콩죽을 받아먹은 에사우는 그 불콩죽 덕분으로 상속권을 빼앗긴 것을 참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소작인들이 내는 소출의 일부는 그 땅의 주인이 주인의 외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또 주인 입장에서는 아들에게 주어야 할 그 땅을 소출을 내는 동안 그 사람들에게 유예할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인은 착해서 아들이 죽어도 자신의 것으로 땅을 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봉헌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그리스도에게만 유보된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을 인정하고 그 상속권을 우리에게 유예해 달라는 행위입니다. 그분이 상속자라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그 인정한 불콩죽이 나의 영원한 기쁨으로 되돌아옵니다.
2020년에 개봉한 성동일과 하지원 주연의 “담보”의 줄거리입니다. 성동일은 냉혹한 대출 업자입니다. 불법 체류자인 아홉 살 서이를 둔 엄마는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성동일은 아이를 잠시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담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서이 엄마는 경찰에 걸려 다시 중국으로 추방 당합니다. 병이 든 서이 엄마는 다시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잔혹한 대출 업자이지만 서이에게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리고 서이가 나쁜 이들에게 팔려가고 이용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로 택배 배달을 하며 서이를 키웁니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면서까지 서이 대학 졸업을 시키고 중국의 서이 엄마에게 서이를 돌려줍니다. 서이 엄마는 훌륭하게 성장한 서이를 보며 성동일에게 절을 합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습니다.
우리가 하는 봉헌은 이 영화의 ‘담보’와 같습니다. 봉헌은 나의 처지에서는 내가 드리지 않으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처지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는 하느님의 처지에서는 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만 하게 만드는 ‘독’과 같습니다. 물론 행복한 독입니다. 마치 아기의 웃음으로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을 아이에게 내어 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지극한 사람에게 보내는 인정과 감사의 봉헌은 그 사랑 지극한 사람을 나를 위해 죽게 만들 힘을 발휘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끝끝내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는다면 부모라도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일방적인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불콩죽도 내어주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취했다면 영화 ‘공공의 적’에서 자식이 보험금 때문에 키워준 부모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내가 바친 봉헌은 사랑스런 담보가 되어 그분의 생명까지도 내어주게 할 것입니다.
자녀는 최소한이라도 내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부모를 알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 받지만 알아주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받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자녀에게 주고 싶지, 자신을 강탈하는 강도에게 내어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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