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강론과 강의를 하며 신자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나누라고, 견디고 참아 내라고, 가난하고 없는 이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라고 하는 것이 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제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 신자들에게는 한 번 더 고민해야 하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안녕과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투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신념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임지고 의무를 다해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불의와 타협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하고 세상의 가치에 따라서 살아야 하기도 합니다. 옳지 않은 일을 보고 침묵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는 같지 않습니다. 복음의 가치대로 살아가다 보면 세속적인 면에서 대개는 부족하게 받을 것입니다. 성공보다는 후퇴와 실패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숙명입니다. 박해의 삶, 스스로 손가락질과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삶,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의 가치를 위해서는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용기와 강단 있는 삶, 그러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 살아왔다는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을 일상에서 외면하였다는 미안함으로 스스로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그 박해와 미움은 우리의 몫이기에 이 아픔을 두려워하지도 멀리하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비워진 자리는 채워 주실 것이며 상처 난 자리에는 약을 발라 주실 것입니다. 서로 함께 용기를 주며 보듬어 안아 주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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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수영을 배우려는 친구가 있거든 물고기가 되는 법을 알려줘라>
오늘 복음은 세상 속에 속한 교회가 가져야 하는 세계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이 이리들의 마음에 들려하고 그들에게 속하려 한다면 결국엔 잡아먹히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이 사람을 믿으면 될까요? 맞아 죽거나 술에 담기게 됩니다. 비둘기가 사람을 믿으면 될까요? 언젠가는 사람들의 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우리에게 연민을 가진다고 여겨도 절대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 중 기억에 많이 남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한공주’란 영화입니다.
한 여학생이 많은 어른에게 둘러싸여 전학을 강요받습니다. 이름이 ‘한공주’인 이 여학생은 그 어른들에게 눌려 이렇게 말합니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잘못한 게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이미 더럽혀져 자기 자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학생일 뿐입니다.
이때 한 젊은 남자 선생님이 한공주를 데리고 자신의 집에 어머니와 함께 살라고 데려다 놓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잘못으로 전학 온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와 한집에 살아야 하느냐고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교육부에서 생활비를 보조해준다고 하니까 받아들입니다. 성질이 사나운 분이지만 한공주는 이 어머니와도 잘 사귀어갑니다.
한공주는 우선 ‘배신자’라고 부르는 자신의 친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전화번호까지 바꿔놓았지만, 인터넷을 통해 간신히 어머니가 있는 작은 마트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지금 간신히 재혼해서 사는 자신도 힘드니 엄마를 위한다면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딸에게 몇만 원을 주며 밀쳐냅니다.
전학 온 학교에서 한공주를 아무 이유 없이 잘 대해주는 친구가 생깁니다. 물론 한공주의 아픔이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는 천주교 신자 친구. 한공주는 그 친구를 통해 세상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 천주교 친구는 한공주에게 어떤 아픔이 있건 자신이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합니다.
한공주는 수영을 배웁니다. 물에 뜨는 것은 다 할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그러나 잘은 안 됩니다. 그렇더라도 필사적으로 수영을 배웁니다.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수영을 배우는 것은 바로 비정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그렇게 큰 아픔을 치유해가며 세상에 다시 발을 붙이려는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느닷없이 어떤 서류에 사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판 중인 그녀의 가해자 중의 한 명에게 돈을 받고 탄원서를 써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한공주는 사인을 해 줍니다. 아빠는 그렇게 그 가해자들이 준 위로금으로 흥청망청 살아갑니다. 딸의
그 와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수십 명의 가해자의 부모들이 자신들에게도 탄원서를 써 달라고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일어난 대소동. 아무 죄도 없이 학교에서까지 쫓겨 다녀야 하는 한공주.
교장 선생님은 한공주가 그런 연유로 전학 온 지 몰랐다고 하며 학교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근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던 집 아주머니가 사귀고 있던 파출소 소장은 그 아이가 어떤 일을 당한 아이인지 일일이 다 이야기해주고,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그 아이를 내보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공주는 그 집에서도 발붙이지 못하고 찜질방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부모님도, 학교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한공주를 받아주려고 했지만, 그녀의 현실 앞에서는 각자의 길을 가고 맙니다.
결국, 자신을 그렇게 잘 대해주었던 천주교 신자인 자신의 유일한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하지만 그녀도 전화를 받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한공주를 성폭행을 하며 찍어놓은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였는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하게만 살고 싶었던 한공주는 짐 가방을 들고 한강 다리를 걷습니다. 자신과 함께 당했던 친구가 이미 그렇게 했듯이, 자신도 물로 뛰어드는 것 외에는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뛰어듭니다. 물 위로 다시 떠 오릅니다. 이때 다시 생겨나는 살고 싶은 욕망. 그래서 그동안 배웠던 수영을 시도해 봅니다. 하지만 한강의 빠른 물살에는 역부족입니다. 다시 물속으로 잠깁니다. 그렇게 다시 떠오르지 못합니다.
이 영화가 한공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어쩌면 나도 어느 정도는 세상에서 이런 느낌을 받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결국 집처럼 나를 맞아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세상...
한공주는 수영을 배우기보다는 물고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뱀은 어차피 뱀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인이 뱀임을 인정하고 뱀들이 사는 굴을 찾았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화해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둘기처럼 그들에게 물들려 하거나 그들에게 공격을 당할 때 날갯짓 몇 번으로 그들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 살면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한 후 지쳐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막에 함께 머무는 수도자들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고기가 뭍에서 너무 오래 있어서는 안 되지.”
세상은 이리 떼이고 우리는 양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리에서 양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파견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지 못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면 자신도 이리가 되거나 이리에게 먹히는 일이 발생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물고기이고 세상에 나아가 잠깐 선교하고 다시 물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임을 명심합시다. 그것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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