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하느님 백성’이라는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적 사고는 강한 배타성을 지닙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듯이 하느님께서는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계셔야 한다는 신학적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선민의식과 강한 정체성은 하느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며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 아닌, 이스라엘만의 민족 신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이런 보수적 신학의 입장을 거부하는 신학도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은 단순하게 혈통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윤리적 가르침과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혈통이 아닌, 윤리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이를 위한 표현으로 시편에서는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시편 15[14],1)라고 노래합니다. 기존의 가르침에서는 하느님의 천막인 주님의 집에 머무는 것은 유다인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화답송에서는 의로운 사람, 악의와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성별이나 민족이나 능력을 떠나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하느님 백성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격을 얻은 것은 모태 신앙이거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견진성사를 받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남에게 바라는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면서 다시 주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신앙인의 특권을 누려 봅시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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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타 종교나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진 관계의 법칙인 ‘황금률’이 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황금률을 지킬 수 있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들에게 해 주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이런 뉴스가 났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기차 소유주들이 몰래 자기 차에만 밤새 코드를 꽂아놓고 충전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전기세는 온 아파트 주민이 다 내는데 자기만 더 전기를 끌어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더니 자신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분명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해 주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자신이 해 주는 것보다 당연히 자신이 더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이를 ‘피해의식’이라 합니다. 피해의식이 있으면 우리는 황금률을 지킬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피해의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뉴스의 그 사람은 분명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돈에 대한 상처를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든지 형제간에 차별을 받았다든지 사랑이 부족한 어른 밑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했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상처가 되어 그 상처를 세상으로부터 치유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도 다 피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러니 자신의 피해의식을 세상에서 충족하려 할 때는 관계만 악화할 뿐입니다. 누가 같은 전기료를 부담하면서 전기차 가진 사람만 더 사용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치유되지 않은 피해의식 때문에 세상도 분열되고 자연도 파괴됩니다.
피해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치유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또 상처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황금률도 내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룸’(Room: 2015)은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7살 때 닉이라는 남자에게 속아 7년 동안 작은 헛간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이의 이야기입니다.
닉은 가끔 들어와 최소한의 음식과 생필품만을 주고 조이를 감금했습니다. 그리고 잭이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잭이 5살 되었을 때, 닉은 직장을 잃습니다. 조금씩 주던 배급과 전기도 제대로 공급해 줄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조이는 그곳으로부터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처음엔 잭이 독감에 걸린 것처럼 연기했지만 닉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잭에게 죽은 시늉을 하라고 연습시켜 잭을 탈출시킵니다. 잭은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고 결국 엄마 조이를 구하고 닉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조이는 7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고생하며 있었는데 편안하게 살면서 아버지와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해 살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불만, 자신의 딸을 납치해 7년 동안 감금한 닉의 아들인 잭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로 흥미만 유발하려는 언론들, 모두가 조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솟구치게 했습니다. 결국, 조이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합니다.
잭은 자신을 그런 환경에서 낳고 또 자신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엄마 조이가 밉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이기에 잭은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힘을 주려 합니다. 자신의 힘이라며 절대 자르지 않고 길렀던 긴 머리를 잘라 엄마에게 보낸 것입니다. 조이는 잭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인데 엄마인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엄마로서 살아보려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잭이 엄마와 함께 갇혀있었던 헛간을 보고 싶다고 하여 그 헛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겁이 나서 잘 들어오려 하지 않는 엄마와는 다르게 잭은 자신이 갇혀있던 작은 헛간의 이곳저곳과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이는 피해의식과의 작별을 의미합니다.
엄마 조이는 몸은 탈출했지만 피해의식으로부터는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같은 피해를 본 아들 잭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어 그녀 또한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그저 하나의 기억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조이는 이러저러한 상처로 피해의식을 지니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당하셨음에도 또 우리에게 당신 소중한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같은 무한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률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과거의 상처를 그저 좋은, 더 나아가 감사한 기억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분은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상처가 치유되어야 우리도 이웃들에게 요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황금률이 완성됩니다.
자라오면서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절대 즐겁게 이야기하지 못할 상처의 기억을 남겨놓지 맙시다. 그래야 피해의식 없이 타인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족되어 모든 부끄럽고 상처가 된 기억들에 인사합시다. 그리고 갇혀있던 그 방을 나옵시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기 전까지는 서로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입고 나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서로를 존중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황금률이 그리스도의 수난 덕분으로 지켜지는 그런 곳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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