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오 6,24-34)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202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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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오 6,24-34)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2021.6.19.)

by honephil 2021. 6. 19.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원시 시대에는 그저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위험에 노출된 신체를 보호하고자 옷을 입었습니다. 과연 오늘날에도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라는 질문이 아닌,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라고 질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음식이 아닌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자 하겠지요. 그럼 초대된 그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초대해 준 자리에 아무 옷이나 입고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한 자리가 어떤 자리며, 어떤 복장을 해야 하는지 당연히 고민할 것입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옷을 입는 것은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을 고민하며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상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위해서, 우리의 몸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맛집에서 맛난 음식을 먹었다고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연장해 주지 않습니다. 남들이 주목하는 멋진 옷 때문에 우리의 몸이 소중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찰이 나를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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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걱정하며 성체 영한다면?>

 

    오늘 복음의 주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입니다.


한 주인은 세상이고 다른 한 주인은 주님입니다. 세상을 섬긴다는 말은 세상에서의 생존을 걱정한다는 뜻이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늘에서의 생존을 걱정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하늘에선 죽을 것이고, 하늘에서 살려고 하면 세상에선 죽어야 합니다.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살려면 사랑의 법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를 죽일 수 없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살려고 걱정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세상 걱정은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인데, 우리 수명은 우리 손에 달렸지 않습니다.

    

    조선 철종 때 경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서 선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서 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봄이 왔어도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로 곤궁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한 그는 부산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습니다. 효자 아들은 주인께 통사정하여 6개월 치 월급을 임시로 받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서 선달은 1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양반이 이 돈 꾸러미를 발견했는데 세어보니 백 냥이나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한편 서 선달은 30리는 더 가서야 돈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고 전 재산을 잃어버렸으니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돈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횡재라고 좋아하는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
 

   “잃은 사람은 반드시 찾아온다. 목숨같이 귀한 돈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

 

    그 양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몇 시간이고 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 후 서 선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주운 돈을 서 선달에게 돌려주자 서 선달은 “어른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라며 돈을 찾아준 은혜를 갚고 싶어 사례를 하려는데 그 양반은 “은혜랄 게 뭐가 있소, 당연한 일인데.” 하고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습니다. 그는 주운 돈 100냥을 서 선달에게 돌려준 뒤 가던 길을 갔습니다.

 

    서 선달도 다시 집을 향해서 갔고 이윽고 어느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물에 빠졌는데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어 구해 줄 생각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헤엄을 못 치는 서 선달이 보다 못해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저 소년을 구해주면 100냥을 주겠소!”

 

    그러자 어느 장정이 뛰어들어 소년을 구해냈습니다. 죽다 살아난 도령이 선달에게 말하기를 “정말 고맙습니다. 어른이 아니었으면 저는 수중고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 집은 안동에서 제일 큰 부자인데 함께 가시면 100냥을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서 선달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는지라 같이 안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안동의 도령 집은 과연 고래 등 같은 부잣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친이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양반이었습니다.

 

    “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주시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제가 돈을 잃었다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7대 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안동 권 부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답으로 돈 천 냥을 나귀에 실어 서 선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서 선달이 사는 상주 고을을 찾아와 백 섬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갔습니다. 이 일은 후에 조정에까지 알려져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은 모두 조정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은 필시 나의 생존권을 포기하는 것과 맞물립니다. 세상 것을 섬기고 세상 것 때문에 걱정한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만약 서 선달이 자신이 내건 100냥의 돈이 1000냥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랑실천이 그리 어려웠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연히 우리가 사랑을 위해 버리는 생명을 몇천 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러니 성체 성혈이 우리 사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 것이나 세상 목숨을 아까워하는 것은 성체를 영하는 사람의 자세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한 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의 꿈을 스케치하다.”란 주제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첫 질문으로 아이들에게 꿈에 관해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농사짓기, 만수르와 결혼하기, 내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롤스로이스 타기, 치킨 마음껏 먹기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살날이 1년밖에 안 남았다면, 여러분은 꿈을 이루는 것과 5억 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꿈이요.”

학생들은 5억 원보다 ‘내 꿈의 가치’를 높게 생각했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질문을 멈추고 새로운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야기한 학생들 의 아버지들의 답변입니다. 아버지들의 꿈은 무엇일까요?

 

    아들과 배낭여행, 고향에 내려가서 가족과 함께 사는 것,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 자녀와 맥주 한 잔 마셔보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살날이 1년밖에 안 남았다면, 여러분은 꿈을 이루는 것과 5억 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무엇이라 대답했을까요?

 

    “당연히 5억을 선택해서 가족에게 주는 게 낫겠죠.”

모든 아버지는 아내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보다는 돈을 선택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아빠고, 가장이니까요!”

 

[출처: ‘남은 시간 1년. 꿈과 5억 원 중 당신의 선택은?’, 유튜브 채널, ‘석균’]

 

    우리가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통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였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엔 자녀들의 꿈을 자신들의 생명보다 크게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녀가 먹고살 걱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를 믿는다면 부모가 줄 수 있는 것 안에서는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양식을 주십니다. 그 양식이 당신의 생명까지 주시겠다는 보증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아드님의 살과 피로 내어주십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분은 우리 생명을 위해 당신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을 걱정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둘이 병존할 수 없습니다. 죽음 걱정이 없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섬기지 맙시다. 이 세상 것들 때문에 걱정하지 맙시다. 성체에 대한 예의는 단순히 깊은 절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어 하느님께서 알아서 주실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https://youtu.be/ENxrLI6uCU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오 6,24-34)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2021.6.19.)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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