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가 오늘 복음 말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만나게 되는 가슴 뛰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고백함으로써, 우리 서로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 주며, 우리는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공동체로 모아 주시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친절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라는 가르침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용서는 하느님만이 홀로 하실 수 있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창조하다’와 함께 하느님만의 능력을 나타내는 어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용서’라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도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큰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잠시,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며 우리에 속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떠올리기도 싫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밉습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며 주신 특권, ‘용서’를 하느님 안에서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이며 도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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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일어나는 일>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중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는 장면입니다.
산상설교는 진복팔단, 즉 ‘행복’으로 시작합니다. 영원한 생명, 혹은 하느님 나라와도 같은 이 행복은 오로지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당신을 믿어야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고, 오늘 하느님의 자녀만이 바칠 수 있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우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안다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레너드 빅먼 연구팀은 쓰레기통이 놓인 한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경로를 따라 종잇조각을 구겨서 흩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길 건너편에서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들의 비율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전체 보행자 중 쓰레기를 주운 사람은 몇 퍼센트일까요? 2%였습니다.
다음 단계로 연구팀은 쓰레기를 보고 그냥 지나친 보행자 수백 명을 멈추어 세우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민들 모두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의무적으로 주워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청소부의 몫으로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여기서 쓰레기 줍기를 시민의 의무라고 답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10%? 40%? 60%? 놀랍게도 종잇조각을 그냥 지나친 보행자 중 94%가 시민의 의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작은 실험에서도 인간이 알고 있다고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94%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2%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왜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또 다른 사례를 보겠습니다.
미국 국립 암연구소는 1980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500만 달러를 투자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대규모 흡연 예방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시애틀 지역에서 무작위로 선발된 4,000명의 흡연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캠페인의 성공률은 28%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돈과 노력이 투자된 이 그룹 외에도 또 다른 흡연 그룹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그 그룹의 금연율도 조사하였더니 29%로 나타났습니다.
담배를 피우면 건강에 나쁘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이 캠페인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번엔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에게 금연을 설득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지금 말하세요. 자녀들이 들을 겁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이들은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전형적인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캠페인은 오히려 담배를 ‘더’ 피우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라면 더 안 합니다.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에서 했던 ‘6년 금연, 자동차 구입’이라는 캠페인도 생각이 납니다. 담배꽁초 20만 개로 자동차를 만든 캠페인입니다. 이 과정에서 작업하던 30명 모두 면역 이상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중 15명의 흡연자는 꽁초만 많이 만져도 면역체계의 이상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금연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100% 모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정보로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고 싶어도 안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요?
사람은 머리로 아는 지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대로 행동합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라고 결심한 사람은 끊지 못합니다. 하지만 ‘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반복한 사람은 담배를 더 많이 끊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나는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나는 담배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은 ‘내가 그것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로 이어지고 삶은 그 믿음대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것을 바꿔주면 정체성도 바뀝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대로 사람도 변화됩니다.
사람은 정체성대로 행동하는데 그 정체성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더 굳게 믿어집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졌더라도, 그것과 더불어 1달, 1년, 10년 금연한 사람과는 그 믿음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만큼 다시 담배를 피울 확률은 줄어듭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이불부터 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해도 매일 이불이 잘 정돈된 것을 보면 ‘나는 허물어질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겨서 다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승호 회장은 실패할 때마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가슴이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가슴이 펴지면 ‘나는 여기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체성대로 나중에 성공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작은 말과 행동이 결국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던 피터슨의 ‘바닷가재’의 경우와 같습니다. 한 번 싸움에서 이긴 바닷가재는 더 강해지고 한 번 진 바닷가재는 더 소심해집니다. 이를 ‘승자효과’라고도 합니다. 모두 믿음과 정체성에 관련된 이론들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모두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어 세상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자주 바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화 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믿었는데 물 위를 걷게 되었다는 섬나라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행위는 정체성에서 나오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청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자녀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들만 청합니다. 그러니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 그 바치는 자신을 보며 더욱 주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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