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신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계명 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냥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네요. 참 어렵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사랑과 관련된 구절만 살펴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네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스토르게’입니다.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품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사랑은 이웃에게도, 원수에게도, 곧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전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요. 그럼 우리 함께 하늘의 태양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하느님께서 무조건 베푸시는 사랑임을 기억해 봅시다. 태양을 보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원수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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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는 법 : 먼저 생존을 보장받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전작업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심판하게 되면 분별심이 생기고 그러면 선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판단이 일지 않아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일단 판단하여 분별심이 생기면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이 친구인지 적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내가 ‘정글’ 속에서 살고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정글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글은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고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이 더해지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 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 부인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자신과 아기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있습니다.
그녀에게 세상은 정글입니다. 내가 아니면 나와 아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모든 사람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생기는 이유는 상대방이 무언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나를 정글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용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정글은 정글입니다. 정글에서 원수가 생기지 않으려면 정글보다 강하게 나의 생존을 보존해 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가 생기지 않고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아프리카에 간 어떤 사람이 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머리를 숙여라. 무릎을 꿇어라. 기어서 아빠에게 오너라. 이제 일어서라. 잘했다 아들아.”
그렇게 한 이유를 보니 아들이 오던 길 위의 나무에 독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그대로 따릅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지금 정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아들은 무엇이 위험한지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믿으면 독사는 그냥 독사일 뿐 원수가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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