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11) - 부활 제5주간 목요일 (20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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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11) - 부활 제5주간 목요일 (2021.5.6.)

by honephil 2021. 5. 6.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당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속하는 데 있다.”(제27차 청소년 주일 담화문)라고 하셨습니다

 

길 가는 아무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방송이나 여러 매체를 통하여 전쟁과 재해, 기아와 무관심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이 가장 절실한 사람은 어쩌면 나의 가족, 친구 또는 성당 교우나 직장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따금 익명의 타인에게는 선행을 베풀며 돕고 애덕을 실천하면서도, 정작 가장 친밀한 가족과 형제, 친구들에게는 가깝고 편하다는 이유로 사랑과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처를 주고 미워하며 벽과 담을 쌓아 삶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 지옥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쌓아 올린 미움이라는 벽과 담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때로는 아픔을 인내하고, 용서하며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를 천국의 삶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기쁨이 충만해지게 합니다. 기쁨은 사랑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쁨과 사랑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성령의 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하느님 안에서 기쁠 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 만족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애덕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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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에서는 항상 부모와 같은 존재가 만들어진다>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를 통해 가지에 전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사랑과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 ‘사랑’ 안에 머무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물기 위해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과 계명은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입니다.

 

    우선 ‘사랑’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사랑은 에너지이고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영화 ‘알리타’(2019)는 버려진 기계 인간에게 한 과학자가 자신의 딸을 위해 준비한 몸을 붙여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뇌만 살아있던 그 기계 인간은 박사 딸의 몸을 입고 다시 살게 됩니다.

 

    허황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우리가 모두 부모의 태중에서 그렇게 태어납니다. 어디에서 온 지 모르는 영혼을 받아 부모는 자녀에게 몸을 주고 자라면서 세상에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자녀가 생명을 보장받으려면 부모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머물려면 그곳을 만든 이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자녀도 부모의 법을 따라야 부모 안에 머물며 사랑, 즉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법은 항상 부모처럼 생명을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예전에 ‘에일리언’이란 영화가 유행했었습니다.

 

​    에일리언은 부모에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숙주로 삼아 인간을 먹으며 성장하는 놈입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 들어온 에일리언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공존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인간을 그것들이 죽이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의 태중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지만,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법은 주는 사랑만 받으면 되지 그분의 생명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까지 손을 댄 것은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아기가 탯줄과 부모의 살까지 먹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태라면 그에게 더는 사랑이, 곧 생명이 공급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부모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같은 자녀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 품에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원하는, 또 부모가 되라는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일리언처럼 바이러스처럼, 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분 품에서 쫓겨나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영화 ‘터미널’(2004)은 오갈 데 없게 된 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공항에 도착한 주인공의 나라가 내전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설정입니다. 오갈 데가 없어진 나세리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프랑스 드 골 국제공항 안에서 살았습니다. 1999년에 프랑스 당국이 난민용 여권을 내주어 정식 이민자로 받아 주었지만, 공항 생활이 익숙해져서 미친 척을 하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야 할 2006년까지 공항에 머물렀습니다.

 

    나세리는 매일 아침 5시 첫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공항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했습니다. 매우 당당하게 행동하고 구걸이라든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카트 안에 넣어진 동전으로 먹을 것을 사고 주변 청소를 깨끗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항 직원들에게 호감을 샀습니다. 직원들도

 

    그의 일기가 『The Terminal Man』으로 출간되고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드림웍스로부터 30만 달러를 개런티로 받았고 공항 직원들에게 한턱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살기도 했지만, 공항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세리 씨가 18년 동안이나 공항이라는 환경 안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공항이 깨끗하도록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공항 직원들에게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먹고 입고 자고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세리 씨만큼 공항이라는 본성과 가까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며 그곳의 법칙을 따르다 보니 그곳의 본성을 닮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그 사람은 더는 생명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모든 생명은 부모로부터 옵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해치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집에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부모의 법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부모 안에 머물 수 있고 계속 양식을 먹으며 생명을 보존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중략)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0.12)
사랑하라는 말은 생명을 내어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생명을 내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과 생명과 양식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부모만이 사랑의 법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시고 우리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계명이, 부모가 자녀에게 요구하는 계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부모의 계명이란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본성을 닮아 우리 또한 새로운 창조자가 되어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만이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 안에서 성장하여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https://youtu.be/903ccHHE1aI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11) - 부활 제5주간 목요일 (2021.5.6.)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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