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의 특징은 ‘말씀하시는 하느님’ 또는 ‘하느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초대 교회의 어떤 기록보다도 구약 성경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면서, 창조 때부터 지속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업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믿음을 통하여 어떻게 교회 안에서 전해지며, 그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 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은 입에는 꿀같이 달고 위로가 되는 달콤함을 주지만, 우리 마음에 불안을 안겨 주는 칼이기도 하여 깊은 곳을 꿰찌르고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말씀에 꿰찔림으로써 정화됩니다. 곧 말씀인 칼이 처음에는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베어 내어 다시 하느님께 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에게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레위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빛으로 부르시며 당신 말씀의 칼로써 회개의 삶으로 이끄시어 당신의 사랑과 일치하게 하시려는 초대입니다. 우리도 매번 “나를 따라라.”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
<자신들이 죄인인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라>
어제 복음은 네 명의 믿음이 있는 공동체 안에 머무른 병자가 죄도 용서받고 병도 치유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 레위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마르코는 여기서 레위가 어떤 공동체에 머물렀는지를 알게 합니다. 바로 ‘죄인이며 병자임을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문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무엇이 죄인지 알게 할 수 있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끼’(2010)는 한 타락한 형사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목사와 협력하여서 한 시골 마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형사는 큰 죄를 지은 이들을 자기 마을에 살게 하며 자신은 이장으로 권력을 누립니다. 그러나 깐깐한 목사가 눈엣가시입니다. 목사가 죽자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마을에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릴 아무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과 어울리며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몰아내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모두가 다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그것을 감추고 의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누가 들어와도 다 의인처럼 자신을 여깁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주러 오신 분이 필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갔었습니다.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청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죽음을 목전에 둔 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사실 당사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인 줄 알고 일일이 십계명을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에 고개만 끄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뒤에서 환자가 크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물론 외적으로는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물 줄 몰랐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모두가 눈 하나만으로 생활하는 마을에서는 오히려 눈 두 개를 사용하는 사람이 병든 것입니다. 눈을 고치려면 두 눈으로 정상적으로 사는 마을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란 영화 제목이 있었습니다. 조직 보스인 형을 죽인 한 킬러를 동생 킬러가 복수하기 위해 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황정민, 이정재는 모두 킬러입니다. 황정민은 이정재의 형을 죽였고 이정재는 그래서 황정민에게 복수하기 위해 쫓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악에서 구해달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정민이 자신의 딸을 만났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린 딸의 순수한 눈에 죄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트렌스젠더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황정민은 그에게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면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황정민은 딸을 위해 희생하고 그에게 딸을 맡깁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죄인인 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타인을 죄인이라 여기며 살기에 누가 들어가도 그곳에서는 의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리는 길은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