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 한 사람을 치유하려고 네 사람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의 지붕까지 뚫고 병자를 들것에 달아 주님께 내려보냅니다. 중풍 병자를 들것에 달아 내린 사람들이 그 중풍 병자의 친척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이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병자가 지붕의 구멍으로 주님께 도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성과 도움 덕분에 그 중풍 병자는 주님께 치유받고, 죄의 용서도 받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큰일을 해 나가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와 병으로 중풍 병자처럼 누워 있습니까? 아니면 율법 학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고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애덕으로 누군가를 구원으로 이끌어 자신 또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까?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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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든 지옥이든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네 명이 함께 들고 온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분명 육체적 병의 치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죄 용서의 권한이 있음을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하시며 그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같은 내용이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오복음은 그 죄의 용서 권한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그런 초점이 없는 담백한 마르코 복음은 저절로 그를 들고 온 ‘네 명의 믿음’에 맞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직제자는 아니었지만,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만큼, 함께 지내는 ‘작은 공동체’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소공동체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억만장자가 어떤 말을 하는지 들어봅시다.
“당신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 자체입니다. 당신의 친구들을 보여주세요. 그럼 제가 당신의 미래를 보여주겠습니다. 자존감은 자신감의 일종이죠. 또한, 자기 인식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즉, 자존감이 바로 성공을 위한 초석입니다. 자존감이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죠. 자존감은 인생 초반의 7~8년 안에 형성됩니다. 당신은 인생 초반의 7~8년을 누구와 보냈나요? 엄마, 어쩌면 아빠, 손위 형제. 그리고 현자 당신은 누구와 놀러 다니나요?
빌 게이츠는 놀러 다니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스티브 잡스는 놀러 안 다녔어요. 워런 버핏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일론 머스크도 그렇죠. 원숭이와 어울려 다니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당신 인생은 망할 서커스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세요.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십시오. 20년 30년 후 당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찾으세요.
그리고 지금 그에게 가는 겁니다. 당신의 불평에 동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이미 가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멍청한 이들에게만 인생이 여행입니다. 인생은 모델링입니다. 성공은 반드시 단서를 남깁니다. 당신 자신을 모델링 하고 싶은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한 것을 따라 하세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따랐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따랐던 것처럼. 2,500년 전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현재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억만장자가 말하는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워렌 버핏의 공통점」, 유튜브 채널, ‘띵언 저장소’]
이분이 말하는 주요 요지는 어렸을 때 부모와 형제들과 어울리면서 평생을 좌우하는 자존감이 형성되었다면, 사람은 성장해서도 자신과 함께 하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자신이 어울리는 친한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이끄는 그룹과 멀어졌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사귀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운명입니다.
제가 로마에서 공부할 때 한 교사 그룹을 안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성당 다니는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몇 명이 저에게 오더니 자신들 안에 20년 넘게 냉담한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자신들이 데리고 왔는데 성지 순례하며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고해성사를 받도록 유도할 테니까 그가 받겠다고 하면 길거리에서라도 고해성사를 편하게 주었으면 좋겠다고 청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고 그렇게 오랫동안 주님을 떠나 있던 그 교사는 스페인 계단 앞에서 저에게 아주 오랜만에 고해성사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열심히 다니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는 친구 네 명을 잘 만나서 주님께로 인도되었고 병의 치유와 영혼의 치유 은총을 둘 다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잘 깨닫게 해 줍니다.
일단 ‘꼭 만나야만 하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어야 합니다. 그 그룹 아니면 자신을 옮겨줄 다른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속한 소공동체는 일주일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모여야 합니다. 가족처럼 지내야 합니다. 마치 다른 가족이 없는 것처럼.
그다음은 ‘건강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영혼은 물론이요. 육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건강해집니다. 건강한 사람만이 누군가를 건강한 삶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먹고, 마시고, 건강을 해치는 삶에 익숙한 집단이라면 그 속에 속한 사람의 미래는 뻔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죄의 용서’를 지향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한 건강입니다.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분은 그리스도밖에 안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죄의 용서 권한을 교회에 넘겨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원한다면 죄의 용서가 이뤄지지 않으면 머물기 어려운 공동체에 들어가면 됩니다. 처음엔 힘들겠지만, 어둠으로 향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 것입니다.
우선 이런 기준들로 우리 성당에 어느 소공동체, 어느 단체에 들어가야 할지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세례를 받는 분들을 의무적으로 한 단체에 가입하게 하였습니다. 나와도 되고 안 나와도 되는 단체는 안 됩니다. 꼭 나오지 않으면 가족처럼 걱정해주는 단체여야 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어야 하며 고해성사를 멈추면 동시에 그 단체에 머물 수는 없는 단체여야 합니다. 그 소공동체에 머물려는 여러분의 의지가 여러분 영혼 구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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